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정지원 글자가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 –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만든 부처님 : 선유이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이 불상은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삼국시대 불상 중에는 이처럼 이동이 가능한 작은 불상들이 꽤 남아 있습니다.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우리는 이 불상이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남편이 발원(發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상을 품에 넣어 다니던 첫 주인은 바로 그 남편이었겠지요. 지금부터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인 이 작은 불상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정지원’ 글자가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 1919년 부여 부소산성 발견, 높이 8.5cm, 보물, M335-2

<‘정지원’ 글자가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 1919년 부여 부소산성 발견, 높이 8.5cm, 보물, M335-2

<‘정지원’ 글자가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 1919년 부여 부소산성 발견, 높이 8.5cm, 보물, M335-2
작은 불상에 새겨진 이야기

정지원이 죽은 아내鄭智遠爲亡妻
조사를 위해 금상을 공경되게 조성하오니趙思敬造金像
빨리 삼도를 떠나게 해 주소서早離三

여기서 삼도는 죽은 뒤 가게 되는 여섯 길[六道] 중 악한 일을 저지른 자가 가는 세 길[三道]인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를 의미합니다. 남편 ‘정지원’은 아내 ‘조사’가 죽은 뒤 좋은 곳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불상은 명문(銘文)의 ‘금상(金像)’이라는 말처럼 표면이 금빛을 띠도록 청동에 금을 도금하였습니다. 신앙의 대상인 불상 표면에 금을 도금하는 것은 부처의 특징적인 모습을 설명한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와 관련이 있습니다. 부처가 평범한 인간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으로, 이 중 ‘금상’은 32길상 중 하나인 ‘부처의 몸은 미묘한 금색으로 빛난다[金色相]’는 특징을 표현한 것입니다. 32길상을 설명한 주요 경전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어떠한 금색도 부처의 몸에서 나는 금색에 비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불상에 표현된 금빛은 부처를 존엄하고 특별한 존재로 장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광배, 세 분의 불상

이 불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32길상을 또 찾아볼까요? 그것은 ‘부처의 몸에서는 1장(丈)의 빛이 빛나고, 부처는 그 빛 속에 있다[丈光相].’는 특징과 관련이 있습니다. 찾으셨나요?
그것은 바로 부처에게서 발하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입니다. 이 불상에는 모두 3개의 광배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불상의 머리 주변에 동그랗게 표현된 것이 머리 전체에서 발하는 빛인 두광(頭光), 불상의 몸 주변에 길쭉하게 표현된 것이 몸에서 발하는 빛인 신광(身光), 그리고 두광과 신광 구별 없이 부처의 몸 뒤로 온몸에서 발하는 빛을 표현한 것이 바로 거신광(擧身光)입니다.
하나의 광배를 배경으로 삼존불을 배치한 상을 일광삼존불이라고 합니다. 일광삼존불은 중국에서 비롯되어 6세기 후반~7세기 초 한반도에서 형식이 확립되며 크게 유행하였고,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563년, 옛 지정번호 국보 제72호)>이나 호암미술관 소장 <신묘명금동삼존불입상(571년, 옛 지정번호 국보 제85호)> 등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입니다. 특히 중국 산둥성에서 출토된 일광삼존불들은 우리나라 6세기 상들과 비슷한 점이 많아, 당시 중국에서 한반도로 불교문화가 전해질 때 산둥성 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가운데 불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옷은 양쪽 어깨가 드러나는 부분 없이 잘 덮여 있는데[通肩], 이러한 대의를 입고 서 있는 삼국시대 부처님은 대부분 이 상에서처럼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린 시무외인(施無畏印,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의미의 손갖춤)을, 왼손은 아래로 내려뜨린 여원인(與願印, 소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의미의 손갖춤)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왼쪽 협시보살은 상당 부분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불상과 보살상은 몸에 비해 큰 머리와 손, 좌우대칭의 형태 등 초기 불상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특히 가운데 불상에서 보이듯 옷자락이 몸 옆으로 약간 뻗친다거나, 옷의 한쪽 끝단을 가슴을 가로질러 왼손 위로 걸치는 등의 표현은 6세기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담아

이 삼존불을 만든 정지원과 그의 아내 조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많지 않습니다. 큰 광배를 배경으로 삼존불을 배치한 금동삼존불이라는 점, 불상의 얼굴과 몸, 옷의 표현 등으로 보아 6세기경 만들어진 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니 정지원과 그의 아내 조사 역시 이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부소산성 송월대에서 발견된 이 삼존불은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에서 출토되었지만, 사비 시기 백제에서는 정씨(鄭氏)나 조씨(趙氏)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아 외국에서 가져온 불상이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이 작은 불상에 담겨 있다는 것과, 이 상이 당시 사람들의 불교적인 내세 신앙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삼존불에도 돌아가신 스승님, 부모님 등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불상을 제작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어, 개인적인 마음을 담은 작은 불상의 제작이 종종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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