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히라쓰카 운이치[平塚運一]의 <백제의 옛 수도[百濟古都]> : 류승진

지리산 천만 굽이와 섬진강을 그리다

 이징, <화개현구장도>, 조선 1643년, 비단에 수묵담채, 89x56cm, 보물, 신수10579

이징, <화개현구장도>, 조선 1643년, 비단에 수묵담채,
89x56cm, 보물, 신수10579

세로로 긴 축에 상단에는 수묵으로 그린 산수화가, 그 아래쪽으로 긴 글이 있습니다. 그림을 살펴보면 드넓은 강이 앞쪽에 흐르고 뒤쪽으로는 굽이굽이 산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배에 탄 인물들은 곧 강기슭에 도착해 초가 정자를 지나 열린 사립문 안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화면 맨 위에 진한 전서체로 그림 제목인 ‘화개현에 있는 옛 별장 그림[花開縣舊莊圖]’이라 정성스럽게 썼습니다. 화개현이라고 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개장터가 열리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화개입니다. 그림 아래쪽 가장 오른쪽에 쓰인 글은 화개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산들바람에 가녀린 창포 잎 이리저리 물결치고
사월의 화개현 보리 벌써 익어가네.
지리산 천만 굽이 다 둘러보고
배에 몸을 싣고 섬진강 따라 외로이 내려가네.

風蒲泛泛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

이 시는 조선 전기의 문인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이 지은 「악양시(岳陽詩)」입니다. 악양은 경상남도 하동 지역의 악양동(岳陽洞)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림 속의 산이 지리산이며, 배가 떠 있는 강물은 섬진강의 한 줄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여창을 기리는 마음을 모아

족자의 하단에는 1643년에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쓴 시문과 발문(跋文)이 있습니다. 신익성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부마로 자는 군석(君奭)이고, 호는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입니다. 문장과 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작은 해서(楷書)는 왕희지·왕헌지(王羲之·王獻之)에 가까울 정도로 명필이었습니다. 신익성은 줄에 맞추어 단정하고 깔끔한 해서체로 글씨를 썼습니다. 먼저 “선생절구(先生絶句)”라 하며 정여창이 지은 「악양시」를 처음에 쓰고 정여창과 가깝게 교유한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의 「악양정시서(岳陽亭詩敍)」와 시, 그리고 작품의 제작 배경을 밝히는 발문을 썼습니다. 발문 뒤에는 자신의 인장 3개를 찍었는데 주문방인(朱文方印)인 「낙전(樂全)」, 「신익성인(申翊聖印)」과 백문방인(白文方印)인 「군석(君奭)」입니다. 이어서 조식(曺植, 1501~1572)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과 정구(鄭逑, 1543~1620)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서 정여창의 옛 거주지에 관한 기록을 발췌하여 적었습니다.

 1. 신익성, <화개현구장도> 중 하단의 발문, 조선 1643년, 비단에 먹, 보물, 신수10579 <br/>  2. 신익성의 도장 「낙전(樂全)」, 「신익성인(申翊聖印)」,  「군석(君奭)」

1. 신익성, <화개현구장도> 중 하단의 발문, 조선 1643년, 비단에 먹, 보물, 신수10579
2. 신익성의 도장 「낙전(樂全)」, 「신익성인(申翊聖印)」, 「군석(君奭)」
신익성의 낙관 뒤에는 앞의 글보다 조금 진한 먹으로 속도감 있게 흘려 쓴 글이 덧붙여 있습니다. 각각은 조식의 「유두류산록」과
정구의 「유가야산록」 중에서 정여창의 거주지에 관한 기록을 뽑은 것입니다.

그림 속 별장의 소유주인 정여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으로 148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0년(성종 21)에 급제해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안음 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냈습니다. 1486년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지리산에 들어가 악양동(岳陽洞) 부근에 집을 짓고 머물며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습니다. 성리학의 근원을 깊이 탐구한 그는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이끈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화를 당하면서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갔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욱 안타깝게도 갑자사화(1504) 때에는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되었습니다. 그 후, 중종(中宗) 대(재위 1506∼1544)에 우의정으로 증직(贈職)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는 문묘(文廟)에 위패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濫溪書院) 등에서 그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1643년경, 남계서원의 선비들은 정여창을 기념하는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지평(持平) 이무(李袤, 1600~1684)는 남계서원 선비들의 뜻을 모아 정여창 관련 자료를 가지고 신익성을 찾아갔습니다. 악양정(岳陽亭)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정여창을 위해 ‘악양정도’를 제작하여 선생을 추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에 신익성은 “지금은 선생의 세대와 거리가 멀지만 선생의 도는 더욱 밝으니, 그 도로 인하여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유적을 찾아서 그림으로 그리고자 하니, 그 뜻이 부지런하다.”며 이들의 마음에 공감했습니다. 이에 신익성은 당대 제일의 화가인 이징(李澄, 1581~1653 이후)에게 그림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징, 상상해서 악양정을 그리다.

그림을 그린 이징은 종실 화가인 이경윤(李景胤, 1545~1611)의 서자로 태어나 20대부터 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징은 인조(仁祖, 재위 1623~1645) 대에 도화서(圖畵署) 교수를 역임하며 왜란과 호란으로 소실된 궁중의 많은 그림을 복원했습니다. 인조와 사대부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산수화, 영모화, 사군자, 산수화 등 다양한 분야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신익성의 부탁으로, 이징은 사라지고 없는 정여창의 정자를 상상하여 그렸습니다. 현장에 다녀온 신익성과 후학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악양정 일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63세의 화가는 완숙한 기량으로 조선 전기부터 이어진 안견파(安堅派) 화풍과 16-17세기에 유행한 절파(浙派) 화풍을 혼합하여 정제된 산수화를 완성하였습니다. 가로 비율이 넓은 화면에서 우측 근경에 정자를 배치하고 좌측에 강기슭을 두어 넓은 공간감을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산수 구성과 배치는 안견파 화풍을 따른 것입니다. 더불어 암석의 각진 윤곽선과 흑백이 대조되는 면 처리 등에서는 완화된 절파 요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징, <소상팔경도〉, 조선 17세기, 비단에 엷은 색, 덕수1328

이징, <소상팔경도>, 조선 17세기, 비단에 엷은 색, 덕수1328

이징의 절충화풍은 그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 소상강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계절과 기후에 따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소상팔경도는 이상향을 상징하는 고전적인 산수화로 조선 전기에 특히 유행했습니다. 짜임새 있는 구도, 절벽이나 암석 등에서 흑백 대비를 약화시킨 은은한 필묵법 및 윤곽선에 작고 둥근 점을 무리지어 찍은 방식(호초점(胡椒點)) 등은 이징 화법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이징은 평화로운 분위기의 이상적인 산수를 잘 그렸고, 이러한 분위기는 <화개현구장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상향의 산수에서 은거하고 싶은, 귀거래(歸去來)의 마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선현의 별서(別墅)를 그린 이 그림은 정여창을 기리는 후학들의 마음을 담고 있는 동시에, 당대 문인들의 은거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붙은 유호인의 글에도 귀거래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정여창은 같이 벼슬살이를 하던 유호인에게 악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고 이따금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유호인은 이에 악양정을 노래한 시를 지어주었는데, 악양을 두곡(杜曲)과 망천(輞川)에 비유했습니다. 두곡은 당(唐)나라 때 번성했던 성씨인 두씨(杜氏)들의 세거지(世居地)이고 망천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별장을 지었던 곳으로, 문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은거지를 상징합니다.

남쪽 하늘 아래로 돌아가고픈 마음 뭉클하니, 그곳 악양은 모든 곳이 맑고 그윽하지.
선명한 산천은 흥취를 돋우는데 부질없는 벼슬살이는 수심만 자아내네.
두곡(杜曲)의 숲과 못엔 봄볕이 따스하고, 망천(輞川)의 비구름은 저녁 산에 떠 있겠지.
서연(書筵)에서 매일 세 번 강론을 해야 하는데 악양정 앞 빈 배 위엔 달빛만 가득하겠구나.

一掬歸心天盡頭 岳陽無處不淸幽
雲泉歷歷偏供興 軒冕悠悠惹起愁.
杜曲林塘春日暖 輞川煙雨暮山浮
書筵每被催三接 辜負亭前月滿舟.

<화개현구장도>는 정제된 필묵법으로 그린 이징의 그림과 정여창과 유호인의 시, 그리고 시와 발문을 우아하게 쓴 신익성의 글씨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서화가 조화를 이루고 역사적 의미를 더한 그림은 199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록 악양정은 사라졌지만, 후학들은 이 그림을 보며 지리산과 섬진강처럼 변함없이 크고 높은 스승, 정여창을 오래도록 생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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