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히라쓰카 운이치[平塚運一]의 <백제의 옛 수도[百濟古都]>  : 류승진

일본의 근대 판화가 히라쓰카 운이치[平塚運一, 1895~1997]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변의 풍경을 그린 다색판화입니다. 1935년 제10회 국화회(国画会) 출품작으로, 작가가 1939년 덕수궁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에 기증하였습니다.

 히라쓰카 운이치, <백제의 옛 수도[百濟古都]>, 일본 1935년, 다색판화, 33.9×48.5cm, 근대105

히라쓰카 운이치, <백제의 옛 수도[百濟古都]>, 일본 1935년, 다색판화, 33.9×48.5cm, 근대105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오층석탑, 땔감 지게를 진 인물, 그리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석양 무렵의 풍경인 듯, 저 너머 해가 저무는 능선은 붉게 빛나고 그 뒤편 능선에는 이미 푸른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연하게 배치된 판석과 실제보다 경쾌하게 들린 옥개석으로 당당하게 표현된 석탑은 화면 중앙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탑을 등지고 걸어가는 인물 탓인지 그 주변엔 쓸쓸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근대 창작판화의 제작

근대 창작판화(創作版畫)인 이 작품에는 판목(版木)을 찍어낸 순서를 기록한 에디션 넘버가 없습니다. 히라쓰카 운이치는 ‘창작판화’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항상 판목을 스스로 조각한 뒤 한 장만 찍어냈고, 나중에 특별히 부탁받아 다시 찍을 일이 생겨도 번호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대량생산되었던 일본의 전통 목판화와는 전혀 다른 제작 방식이었습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7]에 유행한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는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画師]와 목판을 깎는 조각사[彫師], 그리고 색을 입혀 찍어내는 기술자[摺師]의 분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서양인들 사이에서 일본 기념품으로 우키요에의 인기가 높아졌을 때, 이러한 분업 체계는 더욱 빛을 발하며 늘어나는 국내외 수요에 부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창작자(創作者)’로서의 근대적 ‘예술가’ 개념이 등장하면서, 판화 제작 전 과정에 화가 한 사람의 창조성이 오롯이 반영되는 ‘창작판화’가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운이치는 이러한 창작판화의 대표 작가였습니다. 스스로 창작판화는 ‘조각도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기분[刃物で描くというこの気持]’으로 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그는, 근대 서양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와 전통판화가 이가미 본코쓰[伊上凡骨, 1875~1933]를 동시에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의 전통 다색판화를 근대 예술 장르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일본 근대 예술가의 한국 고대사 탐구

히라쓰카 운이치는 102세까지 장수를 누린 작가로, 판화 제작뿐만 아니라 연구·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 판화의 원류를 찾아 고대 불교 경판(經板)과 기와 연구에 몰두하였고, 자연스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삼국의 불교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부여를 찾아 정림사지를 답사하고 이 작품을 제작한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쇼와[昭和] 7년(1932), 나는 전람회에 출품할 유화 제작과 불교미술 및 기와 연구를 위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한 달 정도 체류한 적이 있다. (중략) 먼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찾아갔다. 여기도 (일본의 아스카[飛鳥]와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어 지금은 돌로 만든 오층탑[平濟塔]이 1기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 백제와 연관이 깊은 아스카 지역을 미리 답사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논밭으로 변해버린 고대 유적지에서 더없이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는데, 부여 정림사지에서도 바로 그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 모양입니다. 이 석탑이 정림사의 것임이 밝혀지기도 전의 일입니다. <백제의 옛 수도> 화면 전체에 감도는 쓸쓸한 분위기는 그가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서 실제 느낀 감정에서 우러나왔을 것입니다. 한편 그는 부여에서 옛 기와를 상당수 수집하는데,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루는 부소산(扶蘇山)이라고 하는 옛 궁전의 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여기 부여에서는 ‘巳’, ‘未’ 등 십이지가 적힌 둥근 도장을 찍은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한 아이가 자기 집에도 글씨를 적은 기와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집에 직접 가 보았더니, 과연 ‘儀鳳二’ 명문이 있는 매우 귀한 수키와[筒瓦]였다. 이전에 평제탑 부근에서 ‘儀鳳四年皆土’ 명문이 찍힌 기와를 수습한 적도 있어, 이를 당시 부여의 총독부 진열관 관장이었던 오사카 킨타로[大坂金太郎]에게 가져갔다. 아무래도 이렇게 수집한 기와를 일본에 가져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중략) 11년이 지난 뒤, 오사카 씨가 경주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고 부여 진열관 관장 후임으로 온 스기 사부로[杉三朗] 씨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히라쓰카 선생이 부여에 다녀가신 뒤 그 사적을 발굴하였더니, 선생이 우리 관에 기증하셨던 수키와의 아래편이 발견되어 ’儀鳳二年‘의 명문을 또렷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호의로 1,200년 동안 헤어져 있던 기와가 다시 만나 완전한 형태가 되어, 지금 진열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후략)

平塚運一, 「木版画のみなもとー仏教版画と瓦」, 『版画芸術』 71(1991) 중에서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 명문이 적힌 기와는 1969년 오사카 긴타로가 발표한 논문 「‘儀鳳四年皆土’在銘新羅瓦」(『朝鮮学報』 51号)에서 다뤄진 후,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왕경(王京)을 정비할 때 사용한 기와로 주목받았습니다. 기와에 연호를 명문으로 새긴 예는 매우 드물고, 특히 당 고종의 연호인 ‘의봉(儀鳳, 676~679)’은 ‘4년명’만이 주로 경주에서 발견될 뿐이어서, 히라쓰카 운이치가 ‘의봉2년명’ 기와를 경주가 아닌 부여에서 수습하였다고 회상한 점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의봉’의 연호와 친숙해진 그는 동네 아이의 집에 있었던 ‘儀鳳二’ 명문 기와의 중요성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봉이년’이 새겨진 수키와, 부여 부소산 출토, 통일신라 677년, 길이 19.0cm, 부여315

‘의봉이년’이 새겨진 수키와, 부여 부소산 출토,
통일신라 677년, 길이 19.0cm, 부여315

이 기와는 지금도 국립부여박물관에 남아 있지만, 일본 근대 판화가 히라쓰카 운이치와의 뜻밖의 인연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20세기 초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인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 일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백제는 일본에 고대 문화의 핵심인 불교를 전해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부여의 불교유적은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주장하는 데 유용했던 낙랑(樂浪)의 중심지 평양이나, 통일신라까지 이어진 유물의 보고(寶庫) 경주 일대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부여의 부소산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심점이 될 부여신궁(扶餘神宮)의 건설 부지로 선택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 이전의 부여는 히라쓰카 운이치와 같이 순수한 지적 탐구심에 일본 고대 문화의 원류를 찾아 나선 이들에게 오히려 더 매력적인 곳이었을 겁니다. 운이치가 이곳에서 얻은 예술적 영감은 <백제의 옛 수도>라는 작은 화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오로지 쓸쓸함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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