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진단타려도>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 - 군주의 글이 담긴 그림 : 강한라

녹색 새순이 돋아난 산길에 신비로운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습니다. 초봄의 기운이 가득 찬 호젓한 산길을 무대로 한 그림 속에서 한바탕 작은 소란이 일어난 듯합니다. 봇짐을 지고 지나던 행인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바라봅니다. 안타까운 눈빛이지만 어쩐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입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나귀에서 호되게 떨어지고 있는 한 선비가 있습니다. 어린 시종은 놀라 들고 있던 짐마저 저 멀리 던져두고 달려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허공을 휘저으며 고꾸라지는 선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합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전 윤두서, 〈진단타려도〉, 조선 1715년, 비단에 색, 110.9×69.1cm, 덕수2022

전 윤두서, <진단타려도>, 조선 1715년, 비단에 색, 110.9×69.1cm,
덕수2022

초록빛 화면이 전하는 기쁜 소식

이 그림은 중국 당 말부터 송 초의 혼란기를 살았던 학자 희이선생(希夷先生) 진단(陳摶, 867?~980?)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다섯 왕조가 잇달아 흥망을 거듭한 오대(五代)의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던 진단은 송나라 태조[宋太祖, 재위 960~976]의 등극 소식을 듣자 웃다가 나귀에서 떨어질 정도로 기뻐하며 “이제 천하가 안정되리라”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화제(畫題)로 한 그림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를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색적인 것은 그림의 소재뿐만이 아닙니다. 세로 1m가 훌쩍 넘는 큰 화면을 가득 채운 장식적이면서도 차분한 필치와 청록의 색채 표현, 감상자의 시선을 그림 속 이야기로 단숨에 끌어들이는 짜임새 있는 구도와 생생한 인물 묘사는 이 그림의 작가가 범상치 않은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화면 왼쪽 위 안개가 자욱한 공간에는 해서체의 단정한 필치로 적어 내린 감상평과 왕의 글임을 뜻하는 ‘신장(宸章)’을 새긴 붉은 도장이 남아 있어, 1715년 8월 상순(上旬) 왕이 이 그림을 열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에 완결성을 부여하듯 자리 잡은 이 제화시(題畫詩)는 바로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남긴 것입니다. 왕의 글이 더해져 한층 더 가치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18세기 초 숙종 연간, 궁중의 서화 취미와 고사도(故事圖) 감상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중국의 옛이야기, 조선의 화폭에 펼쳐지다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畫)는 중국의 사서(史書)와 경서(經書), 나아가 소설 등 문학작품 속 옛이야기를 그린 그림으로, 교화적 성격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왕실과 사대부 사이에서 즐겨 감상되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중국의 고사는 단순히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현재를 성찰하는 교훈으로, 때로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탄생되는 살아있는 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사의 내용을 담은 그림 역시 그 일화가 가진 상징성을 바탕으로 제작되고, 감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오곤 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인 ‘타려(墮驢)’, 즉 나귀에서 떨어진 진단의 일화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18세기 지식인들에게는 익숙한 고사였습니다. 특히 타려 고사는 조선 건국이 곧 하늘의 뜻[天命]에 따른 것임을 노래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인용되면서, 군주의 ‘천명’을 강조하는 일화로서 그 상징성을 조선 왕실의 맥락에서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사의 친숙함과는 별개로 이 이야기를 그려낸 <진단타려도>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진단은 대개 혼란한 세상을 피해 오랜 잠으로 은거하였다는 ‘수은(睡隱)’의 일화로 시각화되어 ‘잠자는 도사’의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진단타려도>의 작가는 기존에 정립된 도상(圖像)이나 참고할 만한 전례가 거의 없던 이 이야기를 고사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이해를 바탕으로 몰입감 넘치는 화면으로 재현해냈습니다. 『용비어천가』 등 일부 서적의 서술 그대로 송 태조의 등극 소식을 전해준 행인을 등장시켜 고사의 내러티브를 촘촘히 시각화했고, 흔히 갈색으로 그려지는 나귀 역시 서술대로 흰색으로 정확히 표현하였습니다.

<진단타려도>는 주인공 진단이 나귀에서 떨어지는 타려 순간의 기쁨과 이 이야기가 전하는 소식의 상서로움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하였습니다. 단순히 나귀 위에서 박수치며 기뻐하거나 이미 추락한 모습이 아닌, 나귀에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화면은 감상자들에게 이 이야기의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나귀에서 떨어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진단의 묘사를 통해 이 일화에 담긴 태평성대의 도래와 성군 출현의 기쁨에 극적인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좌우로 나부끼는 진단의 수염과 놀란 듯 움츠러든 나귀의 모습, 놀라 짐마저 저 멀리 던져놓은 채 달려가는 동자의 표현은 마치 사진으로 그 순간을 기록한 듯 생생합니다.

안개가 깔린 청록의 산수 표현 역시 이 장면이 가진 상징성을 배가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본래 고사에서 진단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늦겨울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 근처였습니다. 그러나 <진단타려도>의 작가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봄빛의 풍경을 선택함으로써 그림 속 이야기의 정취를 한껏 돋우고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화면 좌우에서 교차하듯 내려오는 산자락은 화면 앞쪽에 일종의 무대 공간을 형성하여 그림의 주제에 집중하게 하고, 뒤로 자욱이 깔린 안개와 더불어 화면에 입체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적(知的)인 화제를 긴밀한 구성으로 담아낸 작가는 누구였을까요? 화면 오른쪽 중앙에 흐릿하게 남은 ‘공재(恭齋)’ 인장이 나타내듯 문인화가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일부에서는 공필(工筆)의 청록산수화 표현에 익숙했던 궁중 화원(畫員)의 작품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지요. 확실한 것은 이 그림의 작자, 혹은 주문자는 이 고사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이 화면을 통해 감상자들에게 그림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강렬하게 각인시켰으리라는 점입니다.

숙종과 서화 감상 취미- ‘서화의 묘한 것을 좋아하니’

이 그림에 감상을 남긴 숙종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군주의 이미지로 익숙하지만, 예술적 소양이 남달랐던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서화의 묘한 것을 좋아하니, 깊은 궁 맑은 낮에 때때로 펼쳐보면 한가로운 마음의 경지를 스스로 깨치네”라고 하였던 숙종의 글에서 서화 감상에 대한 깊은 애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서화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바탕으로 감상과 수장(收藏)은 물론 궁중의 각종 화사(畫事)를 주도했습니다.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화사(御眞畫事)와 새해를 기념하는 세화(歲畫) 등 양란(兩亂) 이후 단절되었던 왕실의 시각물 제작 전통을 되살렸을 뿐 아니라, 도화서(圖畫署)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궁중의 서화 수장품을 확대하는 등 잇따른 전쟁으로 위축되었던 조선 후기 궁중의 서화 활동을 풍부하게 하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현재 숙종이 감상했던 그림은 소수만이 전하지만, 그가 서화를 감상하고 남긴 시문(詩文)들은 역대 임금들의 글을 모아 펴낸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통해 오롯이 남아 있어 그의 그림 취미를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주목되는 부분은 여러 장르 가운데 고사도에 대한 선호가 단연 높다는 점입니다. ‘군사(君師)’를 자임(自任)하며 지적인 군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그가 고사도를 즐겨 감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미상, <사현파진백만병도>, 조선, 비단에 색, 170.0×418.6cm, 증7144

작가미상, <사현파진백만병도>, 조선, 비단에 색, 170.0×418.6cm, 증7144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적은 수지만 숙종의 어제가 남아 있는 귀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동진의 장군 사현이 부견이 이끄는 전진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비수전투(淝水戰鬪)를 다룬 이 그림 또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희귀한 주제의 고사도입니다. 화면 왼쪽 위에서 숙종의 어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숙종이 감상한 고사도를 살펴보면, 주제와 소재 면에서 새롭고 다양한 그림을 다수 열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왕들이 대개 ‘군왕의 경계와 귀감’을 주제로 한 고사도들을 한데 엮어 병풍으로 감상하였던 데 비해, 숙종은 기존의 경서와 사서에 더해 유학자들의 저서, 연의소설(演義小說)까지 다양한 출전의 새로운 일화를 독립된 화제로 한 고사도를 감상했고, 때로는 제작을 명하기도 했습니다. 17~18세기는 삽도가 포함된 제왕학(帝王學) 교재와 소설 등 명대 목판본 서적이 대거 유입되면서 고사인물화의 감상과 제작이 한층 더 활발해진 시기였습니다. 정선의 작품 가운데 고사인물화 작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도 시대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주 숙종의 선호가 없었다면 숙종 연간 궁중에서의 고사도 제작과 감상이 이렇듯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상을 남기는 방식에서도 숙종은 이전 왕들과는 다른 방식을 선호하였습니다. 선대 군주들이 주로 고사도를 신하들과 함께 감상한 뒤 제시를 적어 올리도록 요구했던 것과는 달리 대개 스스로 감상의 소회를 남기고, 때때로 왕의 글 즉 ‘어제’가 더해진 화면을 신하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현실에 대한 우의(寓意)로 기능할 수 있는 고사를 담은 화면에 오직 군왕만이 내릴 수 있는 왕의 뜻을 담은 ‘어제’를 결합한 고사도는 군주의 뜻을 오롯이 담아내는 은유적이지만 강렬한 시각 매체였을 것입니다.

붓끝에 시각화된 왕의 메시지

希夷何事忽鞍徙 희이(希夷)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非醉非眠別有喜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夾馬徵祥眞主出 협마영(夾馬營)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從今天下可無悝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歲在乙未中秋上浣題 을미년(1715) 8월 상순에 쓰다

숙종이 감상을 남긴 을미년은 1715년으로, 숙종 재위 41년에 해당하는 해였습니다. <진단타려도>는 40여 년간 그가 쌓아온 경험과 방식에 의해 감상되었을 것입니다. 이 청록의 화면은 서화 감상을 즐겼던 숙종에게 즐거움을 주는 완상(玩賞)의 대상이었을 수도, 혹은 군주로서 새겨야 할 교훈을 일깨우는 감계적(鑑戒的) 성격의 시각물이었을 수도, 그도 아니면 그림을 감상하였던 그 순간의 고민과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전부였을 수도 있지요.

<진단타려도>의 화면과 제시가 노래한 것과 달리, 1715년은 태평성대와는 요원했습니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은 점차 격화되고 있었고 55세의 숙종은 악화되어 가는 병세로 건강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가 하늘의 뜻으로 창업되고 계승되었음을 강조하는 『용비어천가』에 실렸던 진단의 타려 고사를 재현해낸 이 그림은 숙종에게, 그리고 어쩌면 숙종과 함께 이 그림을 감상했을 신하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송 태조가 태어났을 적 그가 난 협마영(夾馬營)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는 하늘의 길조를 덧붙여 언급한 숙종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문치(文治)를 이룬 유교적 이상 국가로 평가되는 송의 창업주이자 혼란스러운 세상을 태평성대로 이끈 성군으로서 송 태조를 본받고자 하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적장자로서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스스로를 성군이자 천명을 받은 ‘참된 군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태평성대의 도래에 나귀에서 떨어질 정도로 기뻐했던 진단의 모습을 통해 당쟁을 일삼는 신하들을 일깨우고자 함이었을까요?

그 의미는 이 그림을 마주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무엇이 담겨 있었든 대폭의 화면을 가득 채운 진한 청록의 색채만큼이나 그 뜻은 상서롭고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진단타려도>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 - 군주의 글이 담긴 그림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