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고려 원공(圓空) 스님을 기리는 탑  : 강삼혜

박물관 앞 드넓은 열린마당 한쪽 벽을 따라 선승을 기리는 장엄한 탑과 탑비가 숲처럼 들어서 있습니다.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전시품들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염거화상탑(廉巨和尙塔, 855년 제작)부터 마지막 거돈사(居頓寺)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1018~1025년 제작)까지 각 시대마다 문파를 대표하듯 거대한 고목과 같이 하늘을 받들고 서 있습니다. 불가(佛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은 승려를 기리는 석조물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과 그 자취가 느껴집니다. 당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고승들을 기리고자, 왕실과 지방 호족들의 지원으로 이처럼 화려한 석조물을 세웠습니다.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고려 1018~1025년 제작, 높이 2.8m, 보물 제190호, 신수192

1.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고려 1018~1025년 제작, 높이 2.8m, 보물 제190호, 신수192
2. 복원된 상륜부 화염보주 장식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종우)

원공국사 지종의 삶과 신앙

이 탑은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 930~1018)을 기리는 탑으로, 강원도 원주 부론면 거돈사 터에 있었습니다. 1025년에 건립된 탑비와 함께 그의 삶과 신앙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지종은 법안종(法眼宗)과 천태학(天台學)을 공부한 승려입니다. 지종은 8살 무렵 중인도 승려 홍범(弘梵)이 개성 인근 사나사(舍那寺)에 있을 때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사』에는 938년인 태조 21년 3월 인도에서 홍범대사가 고려에 온 사실을 전합니다. 홍범은 마갈타국(摩竭陀國) 대법륜보리사(大法輪菩提寺)의 승려로, 그가 고려에 왔을 때 태조가 거리 양쪽으로 의장대를 갖추고 화려한 가마를 준비하여 성대하게 홍범 스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출가한 그해 홍범이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 경철(景哲)에게서 수업을 받았고,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현덕(顯德) 연간(954~959) 광종이 시행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습니다.

지종 스님은 고려 광종의 중국 문화 도입 정책에 따라 959년(광종 10) 중국 오월국으로 유학 가서 영명사(永明寺) 연수(延壽, 904~975)로부터 2년간 법안종을 배워왔습니다. 법안종 사상은 선종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면서 교종사상을 융합하려는 사상이었습니다. 고려 광종(재위 949~975) 초기까지는 선종이 유행하였으나 광종 중기가 되면 법안종이 고려에 알려지게 되는데, 광종이 중국의 연수 선사를 흠모하여 고려 승려 36인을 그 문하로 유학 보냈습니다. 승려들이 유학길을 떠나기 전 광종은 직접 전별연(錢別筵)을 베푸는 환대를 행했다고 합니다.

중국 유학 도중 961∼968년까지 7년 동안에는 절강성 태주에 있는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으로부터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天台敎)를 전수받았습니다. 귀국 직전 2년 동안에는 국청사의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 등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지종이 11년간의 중국 유학을 마치고 970년에 귀국하자 광종은 대사(大師)의 법계(法階)를 스님에게 내리고 금광선원(金光禪院)에 주석(駐錫)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경종, 성종, 목종에 걸쳐 대대로 존경을 받았으며 외석원(外帝院) 주지를 맡는 등 계속 승진하다가 현종(재위 1010~1031) 때 선종의 최고 승계인 대선사(大禪師)를 제수받으면서 광명사(廣明寺)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1013년(현종 4) 84세의 나이로 왕사(王師)로 책봉되었으며, 1018년(현종 9) 4월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같은 달 17일에 입적하였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는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법상종 현화사의 법경이 왕사로 새로 책봉되었는데, 인주 이씨와 같은 최고 문벌 귀족들의 지지 속에서 법상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법상종의 융성에 맞서 천태종이 새로 창립되고 지종과 관련된 문도들은 천태종에 흡수되어, 지종은 천태종 도입에 공을 끼친 승려로 추앙받았습니다.

고려의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에 대하여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왕사와 국사를 두어 임금도 제자의 예를 다하여 나랏일들을 자문하였습니다. 국사의 법계는 국가와 백성의 스승이자 원로로, 학식과 덕행이 높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고승(高僧)에게 내렸습니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경흥(憬興, ?~?)을 국사로 삼은 것이 가장 이른 기록입니다. 왕의 스승인 왕사는 고려 태조(재위 918~943) 때 처음 두었습니다. 이 시기 왕사와 국사 사이에 서열화가 뚜렷하지 않다가 광종 때 왕사였던 화엄종의 탄문(坦文)이 광종 만년인 975년(광종 26)에 국사로 책봉되어, 왕사가 국사로 승진하는 절차가 제도화되었습니다.

왕사와 국사는 교종과 선종에서 가장 높은 법계인 승통(僧統)과 대선사(大禪師) 중에서 책봉되었습니다.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임금이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뒤를 이어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계신 혜심(慧諶, 1178~1234)을 대선사로 임명한 문서 <혜심 고신제서(慧諶告身制書)>(국보 제43호)가 송광사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선종을 비롯하여 법상종 등 유력한 불교 종파 승려들을 왕실에서 주목하여 왕사와 국사로 추대하였고 국가 통합을 도모하는 상징 존재로 삼았습니다. 승려의 장례 때 시호를 추증(追贈)하고 승탑과 탑비를 내려준 사례를 통해 당시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원공국사승묘탑의 세련된 아름다움

 원공국사탑 유리건판 사진

원공국사탑 유리건판 사진

10세기 중반 고려 광종 임금 이후 한동안 승탑이 만들어지지 않다가 현종 임금 때인 11세기에 이처럼 세련된 탑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승탑은 선사의 입적 연대인 1018년에서부터, 탑비가 건립되는 1025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탑신 정면에는 문과 자물쇠가 표현되어 있고 문 위에는 "圓空國師勝妙之塔(원공국사승묘지탑)"이라고 쓴 네모난 액자와 같은 문액(門額)이 있어 주인공을 확실히 알려주며, 이곳이 정면임을 알게 해줍니다.

앞뒤 문비 좌우로는 사천왕이 조각되었고 나머지 두 면에는 창호가 표현되었습니다. 문액의 등장과 더불어 이 탑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탑신 형식은 기둥 대신 화려한 꽃띠 장식을 귀 기둥 자리에 새긴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꽃 장식은 단청 표현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인근에 세워졌던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94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도 볼 수 있으며, 살창 표현은 고달사 서탑(국보 제4호)에서도 시도되었습니다.

불상 기단과 같이 팔각 대좌 위에 팔각 집 모양을 한 전형적인 승탑의 형태는 염거화상탑에서 처음 선보여 원공국사탑까지 기본 형태가 지켜졌습니다. 이 탑이 원래 자리에서 반출되었을 때 지대석은 함께 이동하지 않아 지대석 2매는 원주 거돈사 터에 남아 있습니다. 아래쪽 기단부의 높고 커다란 팔각 중대석에 팔부중이 새겨져 있으며, 화려한 연꽃으로 장식된 상대석은 탑신을 받치고 있습니다.

탑신 위에는 곡선미가 돋보이는 8각의 지붕돌을 얹고 탑신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습니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왓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습니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 지붕 모양의 장식)를 얹혀 웅장함을 더하였습니다. 상륜부는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보개 위에 화염보주를 얹은 상태로 전합니다. 탁월한 조형 감각과 힘찬 느낌을 주는 이 탑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처럼 웅장한 승탑은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자신의 집에 이 탑을 옮겨놓았다가 해방 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이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입수되었습니다.

승탑에 새겨진 사천왕상의 의미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四天王像) 부조는 부처를 호위하는 신장상으로, 승탑에 이러한 부조상이 새겨졌다는 것은 이곳에 묻힌 승려를 부처와 같이 숭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통일신라 때 처음 만들어진 염거화상의 탑 이후로 이러한 신장상이 표현되기 시작하여 고려 11세기 초 작품인 원공국사탑까지 나타나고 그 이후로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신장상이 승탑에 표현되는 시기는 승탑에서 예술성이 한껏 발휘되던 시기이자, 승려의 위상이 가장 높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승탑 탑신 부조상들은 승탑의 제작 연대를 말할 때 하나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 탑의 탑신에 표현된 사천왕상 조각을 보면 앞 시기보다 세련되고 차분한 저부조 수법이 등장합니다. 신체 양감이 극도로 제한되어 다소 위축되고 평평한 반면 얼굴 표현에서는 과도한 양감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1010년 예천 개심사 석탑 팔부중 등 다수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대양식입니다.

탑신에 표현된 사천왕상은 다문천상만 구름 대좌(雲座) 위에 있고 나머지 세 구의 상은 거칠게 표면을 다듬은 석질 위에 서 있습니다. 거친 석질이 약간 앞으로 나와 있어 암좌(巖座)로도 볼 수 있으나 다문천상의 대좌 높이를 고려해볼 때 대좌 표현을 생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전경

원공국사탑 서면 살창과 남방 증장천상 모습

4명의 사천왕 중 서방 광목천과 북방 다문천상의 소매가 묶여서 팔 뒤로 날리는 모습은 조선시대 왕릉 석인상을 연상케 합니다. 남방 증장천상의 목에는 얼굴을 보호하는 금갑(衿甲)이 처음 등장하며, 오른쪽 팔뚝에 활을 걸고 화살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 시기 사천왕상 중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상은 드물어서 재미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11세기 초에 건립된 이 탑에는 문 위에 현판이 걸리고, 사천왕상 부조상에서 새로운 천의 표현과 다양한 갑옷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시도와 더불어 세련된 조각 기법은 고려 현종 대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됩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 원공국사탑 옆에는 현종 11년(1020)에 만들어진 현화사 석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두 석조문화재는 서로 마주 보며 당대의 문화 수준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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