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무늬 토기’는 6세기 말부터 9세기까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676~935)에 유행했던 토기입니다. 도장을 찍듯이 표면에 화려한 문양을 장식해 ‘인화문(印花文) 토기’라고도 합니다. 인화문 장식은 신라인이 개발한 기법으로 고대 동아시아의 그릇 중에서도 신라 토기의 독특함을 잘 나타냅니다.
도장무늬 토기, 경주 월지(안압지), 통일신라 7~8세기, 높이 60cm(왼쪽)
무늬 도장을 찍어 장식한 토기
인화문을 사용하기 전인 4~6세기의 토기 중에도 표면에 갖가지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있지만, 그 문양은 뾰족한 도구로 하나하나 새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장무늬 토기는 무늬를 새긴 도장으로 눌러 찍어 문양을 만드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무늬를 새긴 도장으로 찍으면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문양이 균일하게 표현됩니다. 동시에 문양을 촘촘히 새겨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장으로 찍어서 표면을 장식하므로 제작 시간이 줄어듭니다. 즉 토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면서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토기 생산 기술의 일대 혁신이었습니다.
도장무늬는 어떻게 생겨났나?
그럼 도장무늬, 인화문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필자는 6세기 말경에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화문 기법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발생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 전통적인 장식 방법을 하나씩 개량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기존의 공정을 효율적으로 개선한 결과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인화문 기법이 나타나기 바로 전에는 뾰족한 도구로 삼각형무늬[三角形文]를 새기고 그 아래에 컴퍼스로 원무늬[圓文]를 새기는 것이 크게 유행했습니다(그림1-1). 6세기 말 무렵 신라의 도공은 삼각형무늬와 원무늬 중에 먼저 아래쪽의 원무늬를 새긴 도장으로 찍는 실험을 합니다(그림1-2). 도공은 이전 방식과 새로운 방식을 함께 사용하면서 점차 새로운 방법의 유용성을 알게 됩니다. 이어서 위쪽의 삼각형무늬도 도장으로 찍는 방식을 적용합니다(그림1-3). 이렇게 모든 무늬를 도장으로 찍으면서 본격적으로 인화문 토기가 제작됩니다.
그림1. 인화문 기법의 변천(윤상덕 작성)
처음에는 이전 시기의 문양을 가능하면 똑같이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점차 이를 벗어납니다. 원무늬는 겹원을 사용해서 좀 더 장식적인 요소를 높이고, 삼각형무늬는 마치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형태로 바뀝니다(그림1-4, 사진1). 7세기 후반이 되면 큰 변화가 생깁니다. 토기 표면 전체를 인화문으로 장식하게 된 것입니다(사진2). 또한 여러 문양을 새긴 긴 도장을 고안해서 한 번에 더 넓은 면적을 장식했습니다(그림1-6~8, 사진4). 도장을 사용하면서 생긴 표면 장식 효율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예전처럼 문양을 하나하나 새기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이런 장식은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1. 도장무늬 뚜껑 있는 단지, 신라 7세기, 높이 10.6cm, 동원2028
사진2. 도장무늬 긴 목 항아리, 신라 7세기, 높이 16cm, 신수510
사진3. 도장무늬 뚜껑 있는 항아리,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0.3cm, 덕수4282
8세기, 도장무늬 토기의 전성기
사진4. 도장무늬 뼈 항아리, 통일신라 8세기, 높이 39.6cm, 본관4406
이러한 인화문은 삼국통일 이후에 더욱 성행해 8세기에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때는 5~7개의 무늬를 새긴 도장을 한 줄씩 찍는 방법에서 더 나아가 도장의 한쪽 끝을 축으로 떼지 않고 계속 찍는 방법을 고안합니다(그림1-8). 또한 이 시기에는 문양이 다양해져 각종 꽃무늬, 구름무늬, 기하학무늬가 나타납니다(사진3, 4). 아울러 이들을 가로세로로 연결한 무늬 등 토기 전면에 다양한 무늬를 새겨서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토기를 제작했습니다. 인화문은 뼈 항아리를 장식하는데도 사용됩니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장례 도구였기에 큰 그릇 표면에 화려한 문양을 한껏 장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