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약사여래입상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왼손을 몸과 거의 직각이 되게 앞으로 내밀어 약그릇[藥器]을 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살짝 쥔 자세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본래 몸 뒤에는 광배(光背)를, 발아래엔 연꽃 대좌를 따로 설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동약사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9.0cm, 보물, 본관325

금동약사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9.0cm, 보물, 본관325

이 상은 상체에 비스듬히 속옷을, 하체에는 치마[裙衣]를 입어서 그 일부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 위로는 대의(大衣)를 한쪽 어깨에만 걸치는 편단우견(偏袒右肩) 방식으로 입었습니다. 대의는 가슴 앞에서 비스듬히 늘어뜨려 지그재그의 옷 주름을 형성했으며, 하체에는 물결 모양의 옷 주름이 입체감 있게 새겨졌습니다.
왼쪽 어깨 부근을 자세히 보면 세모꼴 위쪽에 매듭 형태가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을 구뉴(鉤紐)라고 하는데, 몸에 걸친 대의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리와 끈으로 묶은 것을 말합니다. 요즘 스님들이 가사(袈裟) 입는 방식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정수리에 솟은 상투 모양의 둥글고 큰 육계(肉髻), 두 귓불이 어깨까지 늘어진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약간 경직된 얼굴 표정과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 신체 비례임에도 상체의 지그재그와 하체의 물결 모양 옷 주름 등 여러 패턴이 어우러진 시각적 다양성과 강한 입체감으로 완성도를 높여 조형미가 돋보입니다. 불상 뒷면에는 주조할 때 생긴 작은 구멍이 머리에 한 개, 뒤 쪽에 두 개 뚫려 있으며, 도금은 발색이 좋고 안정감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상을 들어 보면 묵직함과 구조적 견고함이 느껴집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근거로 이 금동불의 제작 시기를 통일신라 8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약사여래상이 제작되었던 통일신라 때 약사여래 신앙이 유행했음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의 상체 금동약사여래입상의 상체

 금동약사여래입상의 뒷면 금동약사여래입상의 뒷면

 
통일신라의 약사 신앙

약사여래 신앙(이하 약사 신앙)은 아득히 먼 동쪽의 유리광정토(琉璃光淨土)에 계신 약사여래에게 예배하고 의례를 행하면 질병이 치유되고 수명이 연장되며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약사 경전에 의거한 불교의 신앙체계를 말합니다.
‘약사(藥師)’는 오늘날의 의사를 뜻합니다. 부처는 마음과 정신의 병을 고쳐 준다는 의미에서 대의왕(大醫王)이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몸의 병까지 낫게 해 준다는 약사여래의 개념이 파생된 셈입니다. 약사여래를 영어로 직역하면 메디신 붓다(Medicine Buddha)지만, 의역하면 힐링 붓다(Healing Buddha), 즉 치유하는 부처가 됩니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서 유행했던 힐링 열풍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약사 신앙은 죽은 후의 내세가 아닌 현세의 이익을 중시합니다. 또한 그 내용은 어렵지 않고 대중적이어서 동아시아에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긴 생명력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약사 신앙에 실천행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통일신라에서는 승려들이 『약사경(藥師經)』 해설서를 편찬할 만큼 약사 신앙이 교학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활약했던 백제 출신의 경흥(憬興) 스님은 『약사경소(藥師經疏)』를 지었고,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태현(太賢) 스님이 쓴 『약사본원경고적기(藥師本願經古迹記)』는 지금도 전하는 대표적인 약사경 주석서입니다.

통일신라의 불교 신자들은 이 세상에 무수한 부처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머물며 가르침을 펴는 수많은 정토(淨土)가 실재한다고 여겼습니다. 통일신라인들은 죽은 뒤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며 사후의 불안에 대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편 현세에서는 자비의 화신(化身)인 관음보살이나 동방 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를 신앙하여 번뇌와 재난과 질병에서 벗어나길 바랐습니다.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의 사면석불(四面石佛)이나 강원도 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 석탑의 탑신에 새겨진 사면불상(四面佛像)에서 약사여래상은 서쪽의 아미타여래상에 대응하는 동쪽에 있습니다. 이러한 불상 배치법은 각 방위에 따른 정토 관념이 정형화됨에 따라 약사여래가 동방 유리광정토에 머문다는 신라인들의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말(强古乃末)이라는 장인(匠人)이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진표(眞表) 율사는 금강산에 들어가 절과 탑을 세우고 불상을 주조하며 약사여래를 도량의 주존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특히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하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했던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는 약사 신앙이 크게 유행해, 소형 금동불부터 대형 석불까지 전국적으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약사여래상의 도상(圖像)과 기능

약사여래상은 손에 지물인 약그릇[藥器]을 든 모습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약사여래상은, 여래상들 가운데 한쪽 손가락을 세워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그 존명(尊名)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도상(圖像)입니다. 이 금동여래입상이 왼손에 쥔 약그릇은 아래쪽이 둥글고 윗부분은 옆으로 잘린 듯 편평한 형태입니다. 아마 그릇 안쪽에는 병을 고쳐 주는 약이나 배고픔을 없애 주는 곡식이 들어 있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약사여래상의 약그릇에 대한 도상의 근거로는 중국 당대에 활약한 밀교승 불공(不空, 705~774)이 730년대 이후에 한역(漢譯)한 『약사여래염송의궤(藥師如來念誦儀軌)』의 “약사불 좌상은 왼손에 약그릇[또는 보물 구슬]을 든다.” 같은 부분이 언급되곤 합니다. 이 구절은 마치 앉아 있는 약사여래좌상의 모습을 묘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중국 당나라와 통일신라 약사여래상 중에는 조각 양식 면에서 이 경전이 번역된 때인 8세기 전․중기보다 이른 시기로 편년 할 수 있는 입상들도 많습니다. 따라서 손에 약그릇을 든 약사여래의 도상이 반드시 이 경전의 구절에 근거해 형성되었다고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어떠한 도상 요소나 시각적 관습이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옛날 약사여래상은 어떤 맥락에서 신앙의 현장에 있었을까요? 대형 상들은 법당의 주존인 예배 대상으로 봉안되었겠으나 그 밖의 상들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려 주는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당나라 승려 현장(玄奘)이 650년에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등 일련의 약사 경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약사여래의 형상을 1구 또는 7구 만들어 여기에 꽃과 향 공양을 올리고, 당번(幢幡)으로 장엄하며, 상을 중심에 두고 오른쪽으로 도는 예경(禮敬)을 권장합니다. 사람이 죽어 갈 때는 약사여래상 앞에 7층의 등(燈)과 5색의 신번(神幡)을 차려 놓고 『약사경』을 독송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속명법(續命法)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중국 수당대의 둔황석굴[敦煌石窟] 벽화에 그려져 있어 참고가 됩니다. 일본에서는 8세기 중반 이후로 약사회과(藥師悔過)라 하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경전을 읽고 공양하며 참회하는 예참법(禮懺法)이 빈번히 행해졌습니다. 이런 이웃 나라의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 상을 비롯해 현재 전하는 통일신라 약사여래상에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종교적 기능의 여러 가능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작 기법

불교의 신성한 예배 대상인 불상도 결국은 사람이 재료를 가공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작 기법을 파악하는 것은 불상의 구조적 특징뿐만 아니라 조각 양식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의 오른팔 부분 금동약사여래입상의 오른팔 부분

 금동약사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높이 36.5cm, 본관324 금동약사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높이 36.5cm, 본관324

다시 금동약사여래입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상의 제작 기법에서 주목할 점은 별주식(別鑄式)이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별주식이란 금동불 주조 시 신체의 일부를 별도로 만든 후 결합시켜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상을 자세히 보면 오른팔 전체를 따로 만들어 어깨 부분에 끼웠습니다. 마치 조립식 장난감을 연상케 합니다. 통일신라 금동불 대부분이 하나의 덩어리로 주조된 사실을 고려하면 특이한 예라 하겠습니다.
별주식은 금동불 제작의 편리함과 표현의 다양성을 위해 고안되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상도 오른쪽 팔을 별도로 만듦으로써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 부분의 입체감을 강조하거나 지그재그 무늬 같은 세부를 효과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만약 별주식이 아니었다면 오른팔에서 이 정도의 조각적 물성(物性)과 존재감이 드러나진 않았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금동불 가운데 별주식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오른손을 들어 올린 금동약사여래입상,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의 구로세[黑瀨] 관음당에 모셔진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금동여래좌상 등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약사여래입상 역시 이 상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팔을 별도로 주조하여 몸체에 결합했습니다. 일본 구로세 관음당 금동여래좌상은 편단우견의 착의법에 따라 드러난 오른쪽 가슴과 팔을 따로 만들어 나머지 부분과 자연스럽게 결합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의 철불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어, 주조 기법 면에서 금동불과 철불의 연관성을 짐작케 합니다.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328호)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제작 당시의 불교 신앙, 금동불 제작 기법 등에 관한 중요한 정보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작은 보고(寶庫)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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