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석굴수서(石窟授書)>, 근대기 우리 서화가가 그린 신라 역사

 <석굴수서>, 이도영, 1922년, 비단에 엷은 색, 181.3×85.7cm, 동원2605

<석굴수서>, 이도영, 1922년, 비단에 엷은 색, 181.3×85.7cm, 동원2605

화폭에 그린 신라 김유신 이야기

앳된 소년이 동굴 앞에서 백발노인에게 책 한 권을 받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지팡이 든 신선 같은 모습의 노인과 몸을 구부려 책을 받들고 있는 인물은 동굴이라는 공간적 배경, 주변에 놓인 기물(奇物)들과 어울려 신비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적은 ‘석굴수서(石窟授書)’라는 제목이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 줍니다. 얼핏 중국의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고사인물화(古事人物畫)나 도교 또는 불교와 관련된 인물을 그린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畫)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서화가인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1884~1934)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내용을 그린 것입니다.
‘신라 진평왕 28년(新羅眞平王二十八年)’으로 시작하는 긴 제발(題跋)은 단번에 화면 속 이야기가 바로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임을 알려 줍니다. 제발은 『삼국사기』 제41권 열전(列傳) 김유신(金庾信) 편에 나오는 문장을 축약해 옮긴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진평왕 28년인 611년, 17세가 된 김유신은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를 자주 침범하자 오악(五嶽) 가운데 중앙에 있는 중악(中嶽)의 한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도와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4일째 되던 날 자신을 난승(難勝)이라 밝힌 노인이 나타났고, 이를 범상치 않게 여긴 김유신은 적을 물리칠 방술(方術)을 예닐곱 번 청하여 마침내 노인에게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발을 바탕으로 보면, 화면 속 동굴은 중악을 표현한 것이고, 두 인물이 바로 난승과 김유신입니다.

이도영은 스승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화풍을 본받아 주변의 산수와 인물을 단정한 필치로 치밀하고 꼼꼼하게 그렸습니다. 공간적 배경인 중악 석굴은 내부가 각진 암벽으로 이루어진 그리 깊지 않은 동굴로 묘사했습니다. 동굴 주변 바위의 굴곡진 부분에는 검은 윤곽선을 두른 청록색의 작은 점들을 집중적으로 그려 이끼 낀 동굴이 자아내는 태고(太古)의 느낌이 잘 드러납니다. 이도영은 기존의 도상(圖像) 전통이 없는 난승과 김유신을 중국 고사인물화의 인물 묘사에 기반해 그렸습니다. 이때 난승이 입은 붉은 옷의 어깨 부분에 금니(金泥: 아교에 갠 금박 가루)로 태극과 팔괘를 그려 도교의 신선이 지닌 신성한 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김유신이 입은 푸른 옷을 통해 신라 화랑의 기백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세련된 대조는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주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의 두 인물이 만나는 순간을 명확히 담아냅니다. 주변 탁자 위에 놓인 토기는 고사인물화에 흔히 등장하는 고대 중국 청동기와는 다른 모양새로, 신라 토기의 형태를 조합하고 변형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고사인물화의 전통적인 표현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주제와 소재 면에서 우리 역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석굴수서> 부분(김유신) <석굴수서> 부분(김유신)

 <석굴수서> 부분(난승) <석굴수서> 부분(난승)


근대기 역사 인물에 대한 인식의 확산

중국의 역사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을 그린 고사인물화는 많은 데 비해 우리 역사 인물을 그린 고사인물화는 흔치 않습니다. 조선 중기의 서화가 조속(趙涑, 1595~1668)이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명을 받아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를 그린 <금궤도(金櫃圖)>가 우리 역사를 다룬 대표적인 역사 고사도(故事圖)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역사 인물에 대중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강제로 을사늑약(1905)을 맺어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뒤부터입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중을 계몽하고 애국정신을 일깨우는 단체 및 출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을지문덕(乙支文德), 김유신, 강감찬(姜邯贊), 이순신(李舜臣) 등 역사 인물에 관한 정보가 『유년필독(幼年必讀)』(1907) 같은 교과서를 비롯해 각종 논설과 전기를 통해 널리 퍼졌습니다. 『유년필독』에 이순신, 민영환(閔泳煥) 등 역사 인물의 삽화를 그렸던 이가 바로 이도영의 스승 안중식이었습니다. 안중식은 1906년 오세창(吳世昌, 1864~1953)과 함께 민중 계몽 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설 회원으로 참여했는데, 이때 제자 이도영을 교육부 간사로 참여하게 했습니다. 당시 이도영은 『대한매일신보』에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전부터 역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다양한 단체에 참여해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며 인쇄 및 출판과 관련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의 신라 예찬

이도영이 이 작품을 제작한 것은 1922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조선인 서화가를 대표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석굴수서>와 신라 토기 및 고려청자 꽃병 등 우리 문화재를 그린 <정물(靜物)>이라는 제목의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를 함께 출품했습니다. 그가 제작하는 작품은 전람회를 개최하기 전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선 고대의 탁월한 문명을 자랑하고자 열심히 연구 중”이라는 내용의 기사에는 그가 신라 문무왕 때 김유신이 석굴에서 신인(神人)으로부터 병서(兵書)를 받는 역사적 사건을 그린다는 내용도 소개되었습니다.

 「나려고기(羅麗古器)와 사적(事蹟)」, 『매일신보(每日申報)』, 1922년 5월 19일

「나려고기(羅麗古器)와 사적(事蹟)」, 『매일신보(每日申報)』, 1922년 5월 19일

조선 고대 문명을 자랑하고자 했던 그의 작품 제작은 1910년대 이후 식민지 현실 속에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원류를 찾고자 했던 당시 조선 지성계의 동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안확(安廊, 1886~1946)이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당시 조선 미술을 쇠퇴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들은 단군 이래 통일신라에 이르는 고대 시기를 조선 미술의 최전성기로 파악했습니다. 비록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김유신을 외세인 당나라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음험한 정치가로 평가했지만, 안확은 신채호와는 달리 신라의 삼국 통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통일신라를 찬란한 문화를 가진 나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조선 지식인들의 고대사 인식 이면에는 한반도 고대사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각도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학자부터 관료, 언론인, 비평가, 골동품상 등 다양한 계층의 일본인들은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강제 병합 이전부터 신라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내내 신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는 신라를 “조선 예술의 황금시대”라 규정했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98~1961]는 “어둡고 적막한 조선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광명의 시대”라 찬양했습니다. 1910년대 이후 경주 지역의 고적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고 보존 활동과 전시가 이루어지면서 고대 신라문화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었습니다.

전통에서 찾고자 한 조선의 정체성

 <정물>, 이도영,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수록

<정물>, 이도영,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수록

이도영이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관설(官設) 미술전람회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하면서 신라의 역사와 유물을 소재로 삼은 점은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19년 안중식이 죽은 뒤 조선 최초의 근대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를 이끌던 이도영은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의 심사위원을 지냈고,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당시 조선 화단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서양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확산되고 일본화(日本畫)가 조선 화단에 깊숙이 침투하는 상황에서, 전람회라는 근대적 제도 속에서 서화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은 그에게 닥친 중요 과제였습니다. 이에 그가 제시한 해답은 전통의 틀 안에서 조선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단순히 일본인이나 조선 지식인의 조선 고대문화에 대한 감수성만을 추종했다면, 신라 탄생 설화나 석굴암 같이 일본인 화가들도 관심을 보였던 익숙한 소재들을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사인물화나 도석인물화라는 전통적인 화목(畫目)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신라의 통일 영웅 김유신이 도교적인 신선과 만나는 극적인 장면을 소재로 선택했습니다. <석굴수서>와 같이 출품한 <정물> 역시 기명절지화의 전통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종래의 중국 고대 기물들을 우리 고유의 것으로 완전히 대체한 작품입니다. 더욱이 작품 제목으로 동양의 기명절지와 비교되는 서양화의 정물 개념을 차용해 동서양화를 한 작품에 모두 담아내면서 단순한 소재 선택을 넘어서는 혁신을 드러냅니다. 이도영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심사위원으로만 참여하고, 주로 서화협회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고유의 정체성이 담긴 기명절지화를 지속적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이 비록 일제의 식민주의를 완전히 극복하거나 뚜렷한 근대성을 담아낸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조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그의 노력과 작가 의식은 일제강점기 우리 근대 화단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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