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당(唐) 승려 징관(澄觀, 738~839)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단 주석(註釋)을 송(宋) 승려 정원(淨源, 1011~1088)이 모아 경전 본문 아래에 수록한 것입니다. 전체 120권 중에서 권30 부분을 목판에 새겨서 인출(印出)한 것인데, 인쇄 상태로 보아 실제 인출된 시기는 훨씬 후대인 14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經, 경전)이나 그 가르침을 연구한 논(論, 논문)에 단 주석을 소(疏)라고 합니다. 이 소장품의 명칭이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인 것은 『대방광불화엄경』 본문과 그에 대한 주석을 수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 고려 14세기, 접은 면 32.3×10.8cm, 증3459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 고려 14세기, 접은 면 32.3×10.8cm, 증3459
두 번째 줄에 징관(澄觀)이 (『대방광불화엄경』에 대한 주석을) 짓고 정원(淨源)이 이를 수록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본화엄경(周本華嚴經)』

당 승려 징관은 그 제자 종밀(宗密)과 함께 중국 화엄학(華嚴學)을 대표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원본으로 삼아 주석한 『대방광불화엄경』은 그보다 한 세기 앞서 활약한 당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가 번역한 『주본화엄경(周本華嚴經)』입니다. 이 소장품을 보면 큰 글자 부분이 『주본화엄경』이고, 작은 글자 부분이 그것에 대한 징관의 소, 즉 주석입니다.
『주본화엄경』이란, 당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국호를 주(周)로 정했을 때 한역된 데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모두 80권으로 이루어져 『팔십화엄경』이라고도 하고,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5세기 전반에 번역한 『진본화엄경(晉本華嚴經)』에 이어 새로 번역한 것이어서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이라고도 합니다.

목판으로 찍고 첩장본으로 만들다

이 소장품은 14세기에 인출한 것이지만, 인쇄에 사용된 목판은 모두 11세기 후반에 만든 것들입니다. 중국 송에 유학 가 있던 고려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이 귀국에 앞서 송 항주(杭州)의 각수(刻手)들에게 판각을 주문한 것으로, 판각 완료 후 송 승려 정원이 고려의 의천에게 전달한 것들입니다. 바로 그 목판들로 14세기경 닥종이에 인출한 것을 아코디언처럼 일정한 폭으로 접어서 필요할 때 펼쳐 보고 다시 접어 보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제작 형태를 절첩장(折帖裝)이라 하는데, 그 결과물을 가리킬 때는 흔히 첩장본(帖裝本)이라 합니다.

표지와 본문, 그리고 끄트머리 먹 글씨

상수리나무 열매로 물들인 표지에는 금물로 그은 직사각형 안에 역시 금물로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경전을 펼치는 진언이라는 뜻)의 부호를 표시하였습니다. 이어서 “大方廣佛華嚴經疏卷第三十”이라고 경의 명칭과 권차(卷次)를 써 놓았습니다. 내부는 큰 글자로 세로 각 행 15자씩 20행을 1장으로 하여 각 장을 이어 붙였고, 이를 다시 4행씩 1면이 되도록 접었습니다. 큰 글자들은 앞서 말한 대로 『대방광불화엄경』(『주본화엄경』)의 본문이고, 작은 글자로 된 것은 그것에 대한 징관의 소(疏), 즉 주석인데, 쌍행(雙行)으로 돼 있습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이음새를 통해, 목판 한 장이 세로 15자씩 20행 규모로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장은 4행 1면이 되도록 접었습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이음새를 통해, 목판 한 장이 세로 15자씩 20행 규모로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장은 4행 1면이 되도록 접었습니다.

 끄트머리의 묵서

1 아코디언처럼 일정한 폭으로 접은 첩장본의 표지입니다. 직사각형의 자모선(子母線)을 긋고 그 안에 금니로 명칭과 권차를 써 놓았습니다.
2 끄트머리의 묵서

인쇄된 본문이 끝난 뒤 여백의 끝에 “丁巳七月▣日南白寺持任”, 즉 “정사년 7월 ▣일 남백사(창원시 백월산에 있던 절) 주지”라는 글이 수결(手決)과 함께 묵서되어 있습니다. “▣”부분은 원래 글자를 썼다가 지운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글자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대방광불화엄경소』(옛 지정번호 보물 제1128호)의 말미에 “丁巳七月日◉”라는 글귀와 함께 이 전시품의 수결과 동일한 수결이 있습니다(◉는 판독 필요). 이것으로 볼 때, 남백사 주지의 보관 아래 있던 것이 흩어져서 현재처럼 다른 곳에 있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출 후 바로 불복(佛腹)에 보관되었던지 상태가 매우 양호합니다. 정사년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의천의 중국 유학, 그리고 정원과의 교류

고려의 왕자이자 승려였던 의천은 학문을 깊이 하고 전적을 구하기 위해 송에 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와 송의 교류에 민감해 하는 거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아버지 문종과 대신들, 후에 즉위한 형 선종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벽에 부딪힌 의천은 1085년(선종 2) 몰래 송 상인의 배를 타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송 철종의 배려 속에 의천은 1년 남짓 동안 50여 명의 고승과 교유하며 구법(求法)과 전적 수집에 몰두하였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소』를 만든 정원은 징관과 종밀의 화엄학을 발전시켜 간 대표적 화엄 승려였습니다. 의천은 그런 정원과 송 유학 이전부터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의천은 송 철종의 도움으로 항주에 있던 정원을 만났고, 오월(吳越) 지역을 왕복하는 14개월 동안 무려 59일간 그와 함께하였습니다. 대체로 의천이 정원에게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정원도 의천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의천의 아낌없는 물질적 지원 속에 더욱 깊어 갔습니다. 의천은 정원이 항주 혜인원(慧因院)에서 『주본화엄경』을 강론하게 되자 재물을 희사하여 재(齋)를 베풂으로써 많은 사람이 모이게 했습니다. 또 송에 없던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 등 다수의 전적을 기증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원이 전에 거주하던 곳에 화엄종 제3조(祖) 법장(法藏)의 상(像)을 모시려 할 때에도 다량의 은(銀)을 희사하고 교장(敎藏) 7,500권을 안치하게 하였습니다.

목판의 수령과 고려사(高麗寺)

의천은 송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형님인 선종이 송 철종에게 의천의 환국을 명해 주도록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송 철종의 명령으로 의천은 1086년(선종 3) 귀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서 의천은 혜인원에 머무는 동안 정원에게서 정원 자신이 엮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질을 기증받은 바 있습니다. 의천은 귀국하기 전에 무려 은 3천 냥을 주고 그 전질(全帙)의 판각을 항주의 각수 엄명(嚴明) 등에게 주문하였고, 정원은 1087년(선종 4) 3월 송 선상(船商) 서전(徐戩) 등을 통해 모두 2,900여 판에 이르는 목판을 고려의 의천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 소장품은 바로 이렇게 전해진 목판으로 인쇄한 것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런 문화 교류를 장려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소식(蘇軾)은 국방상의 문제와 국가 정보 유출을 이유로 평소 『대방광불화엄경소』와 같은 전적류의 유출을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의천은 개의치 않고 감사의 표시로 『주본화엄경』과 『진본화엄경』, 『정원화엄경(貞元華嚴經)』의 감지금니사경(紺紙金泥寫經)과 장경각 건립비 금 2천 냥을 혜인원의 정원에게 보냅니다. 정원은 ‘화엄경각(華嚴經閣)’이라는 장경각을 세웠지요. 혜인원이 속칭 ‘고려사(高麗寺)’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의천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판의 향배와 인출본

정원이 송 상인을 통해 전달한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들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지 못하고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일본은 『고려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의 목판과 각종 불서(佛書)를 조선에 거듭 요청하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조선 조정이 1424년(세종 6), 금자(金字)로 쓴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 『아미타경』 · 『석가보(釋迦譜)』 각 1부와, 푸른 종이에 금자로 쓴 『단본화엄경』 1부, 『고려대장경』 인쇄본 1부, 그리고 『밀교대장경』 목판과 함께 『주화엄경(注華嚴經)』 목판, 즉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을 일본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건너간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 중에 이 소장품을 찍은 목판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목판들은 교토 쇼코쿠사[相國寺]에 비치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전부 소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전하는 것은 그 목판들로 찍어 낸 인출본들인데, 이 소장품(권30, 옛 지정번호 보물 제1124호)을 비롯하여, 권21・24(옛 지정번호 보물 제1128호), 권28・29・30(옛 지정번호 보물 제892호), 권41(옛 지정번호 보물 제964호), 권42(옛 지정번호 보물 제891호), 권68(옛 지정번호 보물 제1013호), 권84(옛 지정번호 보물 제1106호), 권97(옛 지정번호 보물 제959호), 권100(옛 지정번호 보물 제892・1106호), 권100~102(옛 지정번호 보물 제892호), 권117(옛 지정번호 보물 제1106호) 등이 있습니다.

가치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에는 중국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한문으로 된 내용과 글씨, 그리고 글을 둘러싸는 윤곽선은 모두 중국에서 생산·정리, 필사되고 디자인·판각된 대로의 것들입니다. 반면 종이와 먹, 인출된 낱장을 연결한 접착제, 절첩장의 형태, 표지에 사용된 금니와 같은 물질 요소들, 그리고 목판에 먹을 칠하여 종이에 찍어 내고, 찍어 낸 장들을 접합하여 일정 크기로 접어서 첩장본으로 만드는 등 일련의 과정과 손기술은 모두 14세기 고려의 것입니다.
나아가 이 소장품에는 그와 같은 국가별 문화 요소의 차원을 넘어 보이지 않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쇄된 내용은 11세기 후반 송나라 정원이 엮어서 자신과 교유하던 유학승 의천에게 선사한 『대방광불화엄경소』이며, 인쇄에 사용된 목판들은 귀국길에 오르기 전 의천의 주문으로 항주 각수들이 판각한 것을 정원이 고려-송의 해상 교역로를 오가는 상인을 통해 고려의 의천에게 전달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14세기에 인쇄된 이 소장품을 11세기 후반 당시 고려와 송 두 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문화·경제 교류의 산물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참고문헌>
남권희, 2008, 12,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初雕大藏經과 『大方廣佛華嚴經䟽』」(『한국학논집』37,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http://www.memorykorea.go.kr/(문화재청 ‘국가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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