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국화와 나비> - 네 형제가 함께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은 <국화와 나비[菊蝶圖]>(덕수 2483)라는 제목의 초충도(草蟲圖) 한 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고 풀잎이 말라 가는 가을 정원에서 국화는 홀로 꽃을 피워 올립니다. 그림 속 두 줄기 국화에는 각각 분홍색과 노란색 꽃이 피어 있습니다. 철 늦은 나비도 반가이 꽃을 향해 날아들고, 여치 한 마리는 꽃 아래를 서성입니다. 국화 곁에는 마른 붓질로 그려낸 작은 바위가 놓여 있을 뿐, 배경은 비어 있습니다. 간결한 화면에 고고한 서정이 묻어납니다. 그림 위쪽 여백에는 화제(畫題)와 발문(跋文)이 있습니다. 넓은 공간에 그림과 어우러진 글은 조선시대 서화(書畫)의 멋을 잘 보여 줍니다. 글과 그림에 남겨진 이야기를 따라 <국화와 나비>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 보려 합니다.

홍낙최, <국화와 나비>, 조선 1751년, 비단에 엷은 색, 61.2×39.2cm, 덕수2483

홍낙최, <국화와 나비>, 조선 1751년, 비단에 엷은 색, 61.2×39.2cm, 덕수2483

국화, 초야에 은거한 선비의 상징

화제는 단정한 해서(楷書)로 썼습니다. 필획의 날카롭고 메마른 기운은 국화 그림과 잘 어우러집니다. 화제의 내용은 국화가 갖고 있는 문학적 전통을 상기시킵니다.

餐之者, 非屈三閭乎. 採之者, 非陶元亮乎. 余嘉斯物之遇斯人而, 又悲斯人之不遇時也. 雖然, 使斯人遇時也. 又安得與此物遇哉. 畫者乎, 其欲採之餐之歟. 抑將時遇, 而物不遇者耶. 俚樂悅人耳, 而大音絶矣. 蒭豢悅人口而菜根遠矣. 聲欲其悅耳也. 味欲其悅口也. 繪事欲其悅目也. 余故曰, 李桃可畫, 菊不可畫, 嗟夫!

(국화를) 먹은 것은 굴원(屈原, 기원전 340?~278?)이 아니었던가. (국화를) 캔 것은 도잠(陶潛, 365~427)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들이 국화와 만난 것을 기뻐하나, 또 이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슬퍼하노라.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가령 때를 만났더라면 또 어찌 국화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그림을 그린 이는 어쩌면 국화를 캐고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장차 때를 만나 국화를 만날 수 없게 될 것인가?
세속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나, 진정 큰 음악[大音]은 끊어지고 만다. 갖가지 고기는 입을 즐겁게 하나, 채소 뿌리 나물은 멀리하게 된다.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맛은 입을 즐겁게 하며, 그림은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얏꽃과 복사꽃은 그릴 만하나, 국화는 그리기 어려우니, 안타깝구나!

국화를 ‘먹는다’는 표현은 굴원의 『초사(楚辭)』 가운데 조정에서 내쳐진 자신의 처지를 빗댄 「이소경(離騷經)」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침에는 목란(木蘭)에 구르는 이슬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 떨어지는 꽃잎 먹는다. 내 마음 정말 곱고 뛰어나면, 오랫동안 조금 초췌한들 어찌 상하겠는가[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 苟余情其信姱以練要兮, 長顑頷亦何傷]?”라는 구절에서 국화는 은거한 선비의 허기를 달래 주는 꽃으로 등장합니다. 국화를 ‘캔다’는 표현은 도잠의 「음주이십수(飮酒二十首)」 제5수 가운데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고, 한가로이 남쪽 산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시구에서 유래했습니다. 대표적 은일자인 굴원과 도잠이 모두 때를 만나지 못한 대신 국화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지만, 그림을 그린 이는 장차 은일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인지 혹은 벼슬에 나아가는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인지 궁금하다는 뜻이 화제에 담겨있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감각적인 ‘세속의 음악’, ‘갖가지 고기’, ‘오얏꽃과 복사꽃’과 담박한 ‘큰 음악’, ‘채소 뿌리’, ‘국화’를 각각 대비시켰습니다. ‘큰 음악’ 또는 ‘큰 소리’로 읽히는 대음(大音)은 『도덕경(道德經)』 41장의 ‘진정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大音希聲].’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화제에서는, 사람들이 감각적인 대상에는 쉽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담박하여 도(道)에 가까운 것들은 멀리하기 마련이라고 하였습니다. 화려한 오얏꽃과 복사꽃은 그리기 쉽지만 수수한 국화의 아름다움은 그리기 어렵다는 표현은 〈국화와 나비〉를 그린 이가 도(道)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찬사에 다름 아닙니다.

<국화와 나비> 화제와 발문 부분

<국화와 나비> 화제와 발문 부분
오른쪽의 화제는 둘째 홍낙명이 짓고 셋째 홍낙삼이 글씨를 썼으며, 왼쪽의 발문은 첫째 홍낙성이 썼습니다.

<국화와 나비>를 제작한 풍산홍씨(豊山洪氏) 네 형제

발문은 그림 그리고 글을 쓴 사람들의 면면을 잘 보여 줍니다. 홍낙성(洪樂性, 1718~1798)이 쓴 이 그림의 발문에 따르면, 그림은 홍낙최(洪樂最, 1735~1757)가 그렸으며 화제는 홍낙명(洪樂命, 1722~1784)이 짓고 홍낙삼(洪樂三, 1734~1753)이 글씨를 썼습니다. 풍산 홍씨 집안의 네 형제가 그림을 함께 제작한 것입니다. 발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此畫即吾弟樂最所作, 而子順文其畫, 子有書其文, 皆妙藝也. 頋余無一於此, 宜曾不與焉. 群弟咸曰, 此非洿藝, 欲合兄弟之蹟耳. 伯氏可無言乎. 余乃吸而題之曰, 吾沈自作之白笔, 則吾於是乎有其二矣. 君輩高得以一, 而惕之哉. 辛未仲秋伯兄子安題.

이 그림은 내 동생 낙최가 그린 것으로 자순(子順, 홍낙명)이 화제를 짓고 자유(子有, 홍낙삼)가 글씨를 썼는데, 교묘한 솜씨가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 (솜씨) 가운데 하나도 지닌 바가 없어 마땅히 함께 참여하지 않았다. 여러 동생이 모두 말하기를, “이것은 재주를 뽐내기 위함이 아니라 형제의 자취를 모으기 위함일 뿐입니다. 맏형께서 어찌 말씀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에 숨을 들이쉬고 쓰기를, “내가 깊이 생각하여 즉흥으로 썼으니[白筆], 이제야 그 둘(글짓기와 글씨)을 갖추었다. 너희는 그 중 한 가지 씩만 높은 수준을 얻었으니, 속이 타지는 않는지?” 신미년(1751) 음력 8월, 맏형 자안(子安, 홍낙성)이 쓰다

네 형제의 아버지는 예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한 홍상한(洪象漢, 1701~1769)입니다. 이들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부마였던 5대조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을 비롯해 대대로 높은 벼슬에 나아간 벌열(閥閱) 가문의 자제들로,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1735~1815)와는 육촌 관계였습니다. 발문을 쓴 맏형 홍낙성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때 영의정에 이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화제를 지은 둘째 홍낙명 또한 훗날 관료로서 병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반면 그림을 그린 막내 홍낙최와 화제 글씨를 쓴 셋째 홍낙삼은 각각 23세와 20세로 요절하였습니다. <국화와 나비>를 제작한 1751년에 홍낙최는 17세, 홍낙삼은 18세에 불과했습니다.

작가미상, <홍상한 초상>, 조선 1759년, 비단에 색, 65.1×47.9cm, 덕수5028 1 작가미상, <홍상한 초상>, 조선 1759년, 비단에 색, 65.1×47.9cm,덕수5028
2 작가미상, <홍낙성 초상>,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색, 46.1×35.1cm,덕수5000

요절한 여기화가(餘技畫家) 홍낙최

홍낙최의 삶에 대한 기록으로 그의 재종형 홍낙인(洪樂仁, 1729~1777)이 쓴 「재종제자선낙최애사(再從弟子善樂最哀辭)」가 있습니다. 이 글은 홍낙최의 체질이 병약하여 책상을 떠나지 않았고, 늘 책을 탐독하며 여인이 규방에 머무는 것처럼 고요했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성정 때문에, 부귀하게 자랐으면서도 고인(古人)의 학문을 좋아했고 출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글에는 홍낙최가 “기이한 꽃과 괴석 그림에 뛰어났는데, 종종 꼭 닮게 그렸으나 오히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善畫奇花怪石, 往往逼, 而亦不屑爲].”는 언급이 있어, 홍낙최가 꽃그림을 잘 그린 여기화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화와 나비>는 홍낙최의 작품으로 확인되는 유일한 작품입니다. 국화 줄기와 잎, 겹으로 핀 꽃송이를 생생하게 묘사한 솜씨는 기록과 잘 들어맞습니다. 국화의 은은한 풍취를 포착한 필력은 맏형의 언급처럼 열일곱 소년이 이르기 힘든 높은 수준입니다. 자신의 그림 솜씨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표현은 홍낙최가 사대부의 일원으로서 화가로 이름나기를 꺼려하였음을 알려줍니다.
홍낙최는 1757년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째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와는 먼저 사별하였고, 다시 맞아들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두지 못한 채 맞은 죽음이었습니다. 맏형 홍낙성은 자신의 둘째아들 홍인모(洪仁謨, 1755~1812)를 죽은 막냇동생의 양자로 보내 제사를 잇도록 하였습니다. 홍낙최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치며 애정을 쏟았던 사람은 <국화와 나비>의 화제를 지은 둘째 형 홍낙명이었습니다. 홍낙명은 홍낙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애도의 글을 부탁하여 동생의 자취를 후대에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이러한 형제들의 노력 덕분일까요. 홍낙최를 이은 손자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순조 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홍현주(洪顯周, 1793~1865)는 정조의 부마가 되었습니다. 후대의 현달(顯達) 덕분에 홍낙최도 죽은 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1751년 네 형제가 함께한 그림은 발문 표현대로 ‘형제의 자취를 모은’ 유일한 작품으로 남아 이들의 우애를 오늘에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스러운 구도에 담은 뜻

<국화와 나비>에는 땅에 뿌리내린 국화의 전체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옅은 가로선과 점으로 지면을 나타내고, 국화가 땅에서 줄기를 뻗어 올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점에서 아마추어 화가다운 성실함이 느껴집니다. 당시에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나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畫譜)』와 같은 중국 목판본 화보를 참고한 국화 그림이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김희겸(金喜謙, ?~1763 이후)의 그림은 국화가 화면 한쪽에 치우친 사선 구도로 그려졌습니다. 자유로운 붓놀림과 산뜻한 채색은 당시 문인들이 선호한 국화 그림의 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강세황, <국화>, 조선 18세기, 비단에 옅은 색, 23.9×15.7cm, 덕수3104 1 강세황, <국화>, 조선 18세기, 비단에 옅은 색, 23.9×15.7cm, 덕수3104
2 김희겸, <국화>, 조선 18세기 중엽, 종이에 옅은 색, 25.1×18.8cm, 덕수2291

반면 홍낙최는 국화를 중앙에, 나비와 여치를 좌우에 배치한 대칭구도를 사용했고 조심스러운 필선과 채색으로 세부를 그렸습니다. 홍낙최는 당시의 유행 대신 옛 그림을 따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소 경직된 대칭구도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작품으로 전칭(傳稱)되었던 <초충도(草蟲圖)>(신수3550)를 떠올리게 합니다.점을 찍어 땅을 표시한 다음 식물을 중앙에 두고 좌우・상하의 대칭을 고려하여 허공과 땅 위에 각각 다른 곤충을 한 마리씩 그렸는데, 이런 구성은 <국화와 나비>와 <초충도>가 같습니다.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전(傳) 신사임당《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중 <들국화>도 화면 중앙에 국화의 전체 모습을 묘사한 점, 꽃의 색이 다른 두 줄기의 국화가 서로 교차하도록 표현한 점에서 <국화와 나비>와 유사합니다.

전(傳) 신사임당,<들국화>《초충도수병》 중 1폭, 비단에 자수, 65.0×40.0cm, 동아대학교박물관, 보물 1 전(傳) 신사임당,<들국화>《초충도수병》 중 1폭, 비단에 자수, 65.0×40.0cm, 동아대학교박물관, 보물
2 전(傳) 신사임당, <초충도> 중 1폭, 조선시대, 종이에 색, 32.8×28.0cm, 신수3550
이와 같은 초충도들은 18세기 문인들에게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인정되어 널리 감상되었습니다.
3 <국화와 나비>(부분)
식물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곤충을 배치한 대칭구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하던 <초충도>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홍낙최가 남긴 다른 그림이 전하지 않으므로 <국화와 나비>의 포치(布置)가 의도적으로 옛 그림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대상 전체를 그리려는 아마추어 화가다운 표현인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노론(老論) 문인들이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하는 초충도 여러 점을 열람하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어머니인 부인의 덕을 찬양하는 글을 남겼던 사실이 주목됩니다. 이들은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하는 <초충도>를 이이와 연관 지어 감상하였습니다. 홍낙최의 집안은 풍산홍씨 가문에서도 특히 노론의 정치적 지향을 가졌습니다. 홍낙최는 부유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자제로 어려서부터 많은 장서(藏書)와 서화골동(書畫骨董)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당시 노론 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포함되어있었을 가능성은 큽니다. 홍낙최는 <초충도>의 고졸(古拙)한 구도와 표현을 따라 그리며 위대한 학자 이이를 떠올리고, 노론 문인들과 동류의식을 더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의 유행에 맞지 않는 <국화와 나비>의 예스러운 구도는 홍낙최가 어린 나이에도 탈속적인 풍모가 뚜렷했다는 기록과도 연결됩니다. 은자의 꽃을 그린 <국화와 나비>는 홍낙최의 자화상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을 떠나 학문에 힘을 쏟는 은일(隱逸)은 사대부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한 태도였습니다. 국화는 사대부로서 그림 그리기에 마땅한 주제라는 생각은 홍낙명이 쓴 시에서도 나타납니다. 선비의 꽃인 국화를 소재로 삼고 『초사』와 「음주이십수」 같은 옛 시문을 인용하여 화제를 붙인 것도, 네 형제가 노론 명문가의 일원으로서 ‘그리기에 합당한’ 서화로 <국화와 나비>를 완성했음을 암시합니다.

꽃과 나비를 그린 이 한 장의 그림에는 18세기 중엽의 문화적 기호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관람자는 선비의 꽃 국화를 그린 17세 소년의 그림 솜씨와 네 형제의 우애라는 표면의 의미에 먼저 마음이 움직입니다. 맏형이 쓴 발문을 들여다보면 형제들이 변변치 못한 재주를 뽐낸다는 혐의를 벗겨내려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이들은 선비의 꽃인 국화를 주제로 삼고 예스러운 구도를 택하여 문인다움을 잃지 않고자 했습니다. <국화와 나비>는 홍낙최 개인의 소탈한 심성으로 빚어낸 그림일 뿐 아니라, 형제들이 공유한 집단의식이 용해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사대부의 마음속 풍경이 <국화와 나비> 한 폭에 펼쳐집니다.

※ <국화와 나비>는 2018년 서화실 정기 교체 주제전시 〈그림으로 피어난 꽃〉(2018. 4. 10. ~ 8. 5.)에 전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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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국화와 나비> - 네 형제가 함께한 그림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