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반달돌칼 - 농경사회를 말하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집터를 발굴하다 보면 빠지지 않고 발견되는 도구가 있습니다. 반달 모양에 구멍이 2개 뚫려있는 반달돌칼인데요. 둥근 쪽에 날이 세워져있기에 ‘칼’이라는 이름을 붙인 생활도구입니다. 어느 박물관에서나 흔히 볼 수 있어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곧 당시 매우 쓸모 있는 도구였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달돌칼은 청동기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어 ‘농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반달돌칼, 청동기시대, 국립대구박물관

각종 반달돌칼, 청동기시대, 국립대구박물관

농경사회의 등장을 알리는 반달돌칼

교과서에도 나오듯이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데 사용했던 도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 초반에는 반달돌칼을 조리도구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곡물을 수확할 때 반달돌칼과 같은 형태의 철제 도구를 사용했고 일본에서는 논바닥에서 반달돌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주변 지역 고고학적 증거들을 토대로 점차 반달돌칼을 수확도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 사용흔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그 용도가 더욱 확실해지고 있는데요. 고배율 현미경으로 본 반달돌칼에 남은 흔적들이 벼, 조, 수수 등과 같은 식물과 자주 접촉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험을 바탕으로 두 개의 구멍에 끈을 연결하여 묶은 뒤 손가락을 넣어 잡고 식물의 줄기를 누르거나 당겨 끊는 방식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달돌칼에는 대부분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이는 더욱 편리하게 잡고 힘의 강약을 조절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반달돌칼은 청동기시대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없었던 반달돌칼이 청동기시대에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청동기시대 사회가 정형화된 수확도구를 다량으로 필요로 하였던 농경사회였음을 나타냅니다.

농경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반달돌칼이 농경사회의 등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도구라니, 농경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고 있는 쌀밥은 언제부터 먹었으며 농경은 언제부터 왜 시작되었을까요?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이 문제를 두고 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연구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를 보면 한반도에서 농경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신석기시대의 농경은 식물 재배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 기장, 피 등은 길러 먹었지만 생활 방식에 변화를 줄 만큼 생계에서 큰 비중은 차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이 삶과 직결되어 생활 방식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행해지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달돌칼을 비롯하여 농경도구로 사용한 많은 양의 석기가 출토될 뿐만 아니라 벼, 보리, 조, 수수, 콩, 팥, 밀, 기장, 들깨 등 재배작물의 종류와 수가 많아지고 수리시설을 갖춘 논과 대규모 밭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경사회’라는 명칭은 청동기시대에 붙이는 것입니다.

반달돌칼의 모양은 모두 반달일까?

반달돌칼이라는 명칭은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것이지만 반드시 반달 모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네모 모양, 물고기 모양, 사다리꼴 모양, 세모 모양 등 다양합니다. 생활도구이기 때문에 분명 모양의 차이가 단순히 디자인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네모 모양 등 일직선의 곧은 날을 지닌 반달돌칼은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반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물고기 모양, 반달 모양 등 곡선의 날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기후, 토양 등 농경이 불리한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는 기능보다는 제작상의 편리함을 고려하여 일직선의 곧은 날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기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지면서 날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기능상의 효율성을 높인 세모 모양(▽)의 반달돌칼이 유행하였습니다. 세모 모양의 돌칼은 직선의 날이 두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에 날 한 부분의 집중적인 사용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종 반달돌칼, 청동기시대, 국립대구박물관

각종 반달돌칼, 청동기시대, 국립대구박물관

오늘날의 낫은 언제부터?

기계화되기 이전까지 농촌에서 사용하던 대표적인 수확도구는 낫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소규모 잡초 제거 등에 낫을 사용합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수확도구가 반달돌칼이라면 낫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요? 낫의 본격적인 등장 역시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마을 풍경을 엿볼 수 있는 부여 송국리 유적 집터에서도 세모 모양의 돌칼과 돌낫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돌낫은 반달돌칼에 비해 발견되는 예가 적습니다. 긴 날을 지녔기에 반달돌칼보다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지만 돌로 곡선의 긴 날을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모 모양 돌칼과 낫, 부여 송국리 유적, 청동기시대, 신수6448 등

세모 모양 돌칼과 낫, 부여 송국리 유적, 청동기시대, 신수6448 등

반달돌칼은 언제까지 사용되었을까?

오랜 시간 동안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함께 했던 반달돌칼은 철기가 유입되면서 점차 사라집니다. 기원전 3~2세기경 한반도 이른 시기 철기 유적인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 유적을 보면 낫과 함께 반달돌칼 역시 철로 만든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확구로서의 역할은 훨씬 더 효율성인 지닌 낫으로 대체됩니다.

위원 용연동 유적 출토품, 초기철기시대

위원 용연동 유적 출토품, 초기철기시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반달돌칼 - 농경사회를 말하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