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고종 망육순 기념 『의궤[進宴儀軌]』 고종의 성수(聖壽), 51세 축하 잔치의 기록

조선의 전통을 이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진연의궤

『진연의궤』는 51세가 된 고종의 망육순을 기념하기 위해 1902년 11월 4일부터 9일까지 경운궁의 중화전과 관명전에서 치른 진연(進宴)을 기록한 책입니다. ‘진연’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를 말합니다. 진찬(進饌)·진작(進爵)·진풍정(進豊呈) 등도 같은 의미입니다. 의궤는 반차도 등의 그림을 수록한 권수(卷首)와 본문에 해당하는 권1,2,3으로 엮었습니다. 이는 조선의 전통을 이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진연의궤입니다. 대한제국 시기 황실 축하 잔치의 면모를 살필 수 있고 황실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던 고종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진연의궤』 4책의 모습, 1902년(광무2), 신수19999

『진연의궤』 4책의 모습, 1902년(광무2), 신수19999

1902년 11월 고종 망육순 기념 진연

고종은 1897년 7월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자주독립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였습니다. 황제국에 걸맞은 체제를 갖추어 위상을 높이고자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무한한 권력을 가진 황제권을 명문화하였습니다. 또한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맞이한 1902년은 고종 황제가 육순을 바라보는 51세가 되는 해였고[망육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해였으며,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처럼 경사가 겹친 해였기 때문에 각국의 외교사절 앞에서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1년 전인 1901년 11월 황태자가 고종황제에게 치사(致詞)와 존호를 올리고 진연을 베풀겠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황태자가 상소를 올린 끝에 1902년 정월 초하루(양력 2월 8일)에 고종 황제가 중화전에 나가 망육순과 즉위 40년의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면서 진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해 4월 고종 황제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고 이를 기록한 『진연의궤』도 발간하였습니다. 그 뒤 망육순을 맞는 탄신일인 만수성절(음력 7월 25일 / 양력 8월 28일) 행사는 몇 번이나 연기된 끝에 11월에 치러졌습니다. 이때의 절차를 기록한 『진연의궤』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림으로 읽는 『진연의궤』- 1책, 권수(卷首)

『진연의궤』의 시작인 권수에는 택일(擇日), 좌목(座目), 그림 등을 채웠습니다. 택일 항목에 고종 황제의 망육순을 축하하는 외진연(外進宴)은 11월 4일 중화전에서, 내진연(內進宴)은 11월 8일 밤에 관명전에서 치르고, 다음날 황태자가 주빈이 된 회작(會酌)은 오전 9시에 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진연 예행연습 날짜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외진연과 내진연에 참석하는 대상이 달라 구분한 것입니다. 외진연은 황제, 황태자와 문무백관이 참석하는 자리인 반면 내진연에는 황실 가족, 친인척 및 명부(命婦) 등이 참여합니다.
그림은 반차도(班次圖), 진연도(進宴圖), 정재도(呈才圖), 채화도(綵花圖), 기용도(器用圖), 의장도(儀仗圖), 악기도(樂器圖), 복식도(服飾圖) 등입니다. 반차도에는 외진연 등 다섯 차례의 진연에 참석한 사람과 사용한 기물을 직접 그리지 않고 그들의 위치를 한자(漢字)로만 표시하였습니다. 진연도에는 진연이 베풀어진 중화전과 관명전의 모습, 다섯 차례의 진연 전경이 담겨있습니다. 정재도에는 진연 축하 당시 춤과 노래의 공연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외진연은 25종, 내진연은 21종입니다. 여기에는 공연 모습뿐만 아니라 악공과 정재인들의 복식, 악기, 기물, 장식 조화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진연의궤』 권수 「중화전 진연도」

『진연의궤』 권수 「중화전 진연도」

진연 절차 및 황제에게 올리는 축하 글 - 2책, 권1

1책에서 그림으로 진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책에서는 글로 본문을 시작합니다. 망육순과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진연을 허락해 달라는 황태자의 상소[睿疏]부터 이를 주관한 황태자의 명령[令敎], 황제의 조칙, 대신들과 나눈 대화[筵說] 등을 순차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진연을 축하하는 악장(樂章), 치사(致詞), 시(詩) 등이 실려 있습니다. 악장은 황태자가 지은 노래 가사 8편과 정재에 사용한 28종의 노래 가사입니다. 치사는 황태자와 문무백관이 황제의 덕을 송축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 기록한 의주는 진연 의식 절차를 자세하게 기록한 일종의 진연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주의 기록을 읽다보면 진연에 실제 참가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 기록으로 진연의식을 복원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진연의궤』 권수 「중화전 진연도」

『진연의궤』 권1 「치사(致詞)-중화전 진연 때 지어 황태자가 직접 올린 치사」
“… 큰 업 이루신 커다란 계책은 아름답게 빛납니다. 잔치를 열어 기쁨을 드러내오며 만세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립니다.…”

진연 행사 준비 기록 - 3책, 권2

3책은 진연의 준비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먼저, 행사 때 지켜야 할 기본 지침[節目], 진연청과 의궤청의 운영을 규정한 사목(事目)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고 문서로는 행사 진행 사항을 황제에게 보고한 주본(奏本), 음식 재료의 물목을 황태자에게 올린 계본(啓本), 그리고 사용할 물품과 비용을 보고한 품목(稟目) 등이 있습니다. 조회(照會), 훈령(訓令), 내첩(來牒), 내보(來報), 감결(甘結) 등은 기관 사이의 요청, 답신, 협조 문서입니다.
다음에는 진연에 사용한 음식 종류와 재료, 그릇의 종류와 상(床), 장식용 꽃[綵花]의 종류와 수량 등을 적었고 기물에 대해서는 사용 후의 보관 장소까지 명시하였습니다. 특히 품목(稟目)에는 진연의궤를 전례대로 생생자(生生字)로 인쇄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생생자는 1792년(정조 16) 정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32만여 자의 목활자입니다. 생생자는 1857년(철종 8) 주자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뒤 언젠가 다시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진연의궤』 권수 「중화전 진연도」

『진연의궤』 권2 「찬품饌品 - 중화전 진연에 올리는 큰 상의 음식 목록」

행사장 배치와 진연 참여 명단 및 비용, 그리고 포상 - 4책, 권3

마지막 권인 4책에는 행사장 기물 배치와 관련된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진연과 내진연이 펼쳐지는 중화전과 관명전의 수리, 행사장에 놓일 물품 자리[排設], 황제와 황태자를 시위하는 데 필요한 깃발, 부월(斧鉞) 등의 수량, 진연 참석자 명단, 행사 담당자[差備]의 수효와 복식 기록, 악공(樂工)과 정재무에 동원된 여령(女伶)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잔치에 동원된 공령만 총 1,419명에 달합니다.
다음에는 진연에서 가장 중요한 시상(施賞) 관련 기록입니다. 잔치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전체 경비 가운데 약 59%나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마지막 재용(財用)편은 행사에 들어간 모든 비용이 세목별로 기록되어 있는 세입세출 내역서인데 총비용이 157만 5,442냥 6전 1푼이었습니다.

『진연의궤』 권3 「재용財用」

『진연의궤』 권3 「재용財用」

성대한 잔치에 ‘국운(國運)’은 점점 기울어

1902년은 고종 황제와 황실에게는 매우 뜻깊은 해였습니다. 그해 4월에는 고종 황제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11월에는 망육순을 축하하는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하지만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은 광화문에 기념비전이 세워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행사가 여러 이유로 연기되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1902년 두 차례 치러진 잔치에 대한제국 1년 예산의 9%에 해당하는 비용이 쓰였습니다. 성대한 기념 잔치로 인한 업무의 공백과 막대한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고, 이후 근대화를 위한 어떤 개혁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대한제국의 국운은 점점 기울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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