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첩은 명대의 서화가 문징명(文徵明)이 북송대 소동파가 지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행초서체로 쓴 것으로 총 12면의 책(冊)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징명이 89세가 되던 1558년 봄, 서화가로서 완숙의 단계에 있을 때 쓴 작품입니다. 그가 서화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다룬 문학작품 주제를 명대 서예가들이 즐겨 쓴 행초서체로 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풍부한 학문적 소양을 갖춘 문인화가 문징명의 개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징명, <후적벽부>, 1558년, 종이에 먹, 22.8×14.4㎝, 동원3379
그림, 글씨, 문학에 뛰어났던 문징명
문징명(1470~1559)은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州縣) 지금의 소주시(蘇州市)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벽(壁)이고 자(字)가 징명(徵明)이었으나, 후에 이름을 징명으로 자를 정중(征仲)으로 바꿨습니다. 명대 문인화풍을 대표하는 오파(吳派, 소주의 옛 지명이 ‘吳’)의 창시자 심주(沈周)의 가장 출중한 제자로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문학가입니다. 서예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고, 그림은 심주에게 배웠으며 문학은 오관(吳寬)에게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서단에서는 축윤명, 왕총, 진순과 함께 오문사재자(吳門四才子)로 부르고, 화단에서는 소주지역 출신인 심주, 당인(唐寅), 구영(仇英)과 더불어 오문사가(吳門四家)로 부릅니다.
문징명의 서예
문징명은 어려서부터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이응정에게 배우면서 스스로 왕희지, 구양순, 조맹부, 소식, 황정견, 미불 등과 같은 대가들의 서체를 습득하며 독창적인 서풍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서예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용필법의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인화가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지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문징명은 해서, 행서, 예서, 초서, 전서 등 모든 서체에 능했으며 특히 소해(小楷, 글씨 크기가 작은 해서체)에 뛰어났습니다. 그의 글씨는 짜임새 있는 글자 결구에 단아하면서 필치가 강건할 뿐만 아니라 고매한 성품과 함께 전형적인 문인의 풍취인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문징명은 하루에도 수차례 천자문을 쓰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서예가로 대성하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그의 천자문 작품을 보면 해서, 행서, 예서, 전서 등 다양한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문징명은 그다지 영특하지 못하여 말이 서툴고, 글자도 늦게 읽었다고 전해집니다. 관직생활을 한 부친 문림(文林)을 따라 유년시절부터 전국 여러 곳에서 생활하며 국사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문징명 자신은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여 54세가 되어서야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한 문징명은 북경에서 한림원대조로서 무종실록 편찬사업 등에 참여하며 관직생활을 했으나 58세에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소주로 귀향하여 자신의 여생을 문장과 서화에 바쳤습니다. 문징명의 서화작품이 60세 이후의 것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명대 소식의 적벽부 수용
적벽부는 북송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시·서·화에 능한 문학가 소식이 황주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지은 작품입니다. 소식의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로 일반적으로 소동파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적벽부는 현실을 잊고 자연을 만끽하는 감정을 표현한 글로, 문인들의 사고관이 반영된 작품이며 중국의 화단과 서단에서 가장 애호된 문학작품이기도 합니다. 적벽부가 문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언어로 뜻을 표현하는 문학과 사물의 외형을 빌려서 뜻을 표현하는 회화의 일치를 주장한 시·서·화 일치사상이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적벽부는 이미 북송대에 도상으로 성립되어 화단에서는 다양한 유형으로 그렸고 서단에서도 역시 다양한 서체로 쓰면서 명대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명대 중기에는 경제적 발달로 각 지역에서 다양한 화파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중에서도 강소성 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오파는 송·원 이래의 문인화 전통을 계승하며 문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파의 화가들은 시·서·화 삼절의 재능을 지닌 문인들로,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생활과 넉넉한 경제적 여건을 배경으로 회화창작 활동을 하였는데 문학작품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즉 서화작품으로 옛 성현과의 정신교감, 고대 문학에 대한 학자적인 감동을 표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려한 행초서로 쓴 문징명의 <후적벽부>
소식은 황주 유배 시절 적벽을 유람하며 1082년 7월 16일에 적벽부를 쓰고 같은 해 10월 15일에 후적벽부를 썼습니다. 이 작품은 소식이 두 번째 지은 후적벽부의 내용을 명대의 서화가 문징명이 유려한 행초서체로 쓴 것입니다. 서첩은 총 12면의 책(冊)으로 구성되었으며, 먹선을 그은 종이에, 한 줄에 8~9자씩 쓴 뒤 4줄을 1면으로 쪼개어 서첩 형태로 표구했습니다. 서체는 먹의 농담을 잘 살려 획의 강약 조절을 했으며 자유분방한 붓의 놀림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작품 말미 제기에 ‘嘉靖戊午春日書(가정무오춘일서)’라고 씌어 있어 1558년 문징명이 89세 되던 해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징명의 자 ‘征仲(정중)’과 호 ‘衡山(형산)’의 인장을 찍어 작품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와 형식이 비슷하고 동일한 시기에 쓴 문징명의 또 다른 행초서 적벽부 작품이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도 있어 이 작품이 지니는 가치를 더해 줍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동원학술논문집』 제18집 「동원 기증 文徵明의 <後赤壁賦> 서첩에 대한 고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