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보살을 그린 번

보살을 그린 번, 둔황, 10세기, 견에 채색, 180.4×28.2cm, 본관4025

보살을 그린 번, 둔황,
10세기,견에 채색,
180.4×28.2cm,
본관4025
서역 불교사원에서 사용한 번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의 불교 사찰에서는 화려한 깃발처럼 생긴 드리개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흔히 ‘번(幡)’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불구(佛具)는 부처의 위덕(威德)을 나타낸 상징물로, 예로부터 당간지주에 걸어 사찰이 있는 성역(聖域)임을 표시하거나 장엄을 위해 법당 안이나 탑 위에 걸었습니다.
번을 사용하는 전통은 서역(西域)이라 칭했던 중국 이서(以西) 지역의 불교사원에도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중국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6세기 중국 양(梁)나라의 혜교(慧皎)가 편찬한 『고승전(高僧傳)』 석도안전(釋道安傳)에는 서역에서 “법회(法會)가 있을 때마다 존상(尊像)을 나열해 놓고 당번(幢幡)을 배치했다”라는 내용이 전합니다. 518년 중국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한 승려 송운(宋雲)은 현재의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호탄 부근의 한 사찰에서 불상과 탑 위에 만여 개에 이르는 화려한 번(幡)과 화개(華蓋)를 건 모습을 보았다고 여행기에 적었습니다. 간쑤 성(甘肅省)에 위치한 둔황(敦煌) 출토 문헌에 등장하는 ‘서번인(書幡人)’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서 번의 제작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려줍니다.

둔황에서 가져온 번

옛 서역의 불교사원에서 사용한 번은 실물로도 전합니다. 특히 많은 양의 번이 발견된 곳은 둔황 막고굴(莫高窟)입니다. 수만 점의 문서와 불화가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 제17굴 장경동(藏經洞)을 비롯해 제122, 123, 130굴 등 여러 석굴에서 다양한 종류의 번이 출토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둔황에서 가져온 번이 9점 있습니다.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수집한 이 번을 정확히 언제 구입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오타니 탐험대가 둔황을 방문한 것은 제3차 탐험이 유일합니다. 당시 요시카와 고이치로(吉川小一郞, 1885~1978)가 1911년 10월 둔황에 먼저 도착하여 장경동을 관리하던 왕도사(王道士)를 비롯한 몇몇 현지인들에게 문화재를 구입했고, 이후 1912년 1월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 1890~1968)가 합류한 뒤 함께 문화재를 구입했으며, 다시 1913년 2월 홀로 둔황을 다시 찾은 요시카와가 추가로 유물을 입수했습니다. 이러한 자료로 미루어 보아 1911~1913년 둔황에서 요시카와나 다치바나가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보입니다.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오타니 수집품의 일부를 입수할 때 번도 함께 우리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번은 폭이 30cm 내외로 좁고 긴 견(絹)에 보살이나 문양을 그려 넣은 모습입니다. 원래는 더 길었지만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로, 현재 가장 긴 번은 길이가 3.71m에 달합니다. 견은 옅은 노란색, 짙은 노란색, 감색으로 다양하며, 바탕색에 따라 보살과 문양이 잘 드러나도록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의 선으로 표현했습니다. 번을 여러 가지 색으로 제작한 전통은 문헌에 등장하는 ‘오색번(五色幡)’, ‘팔색번(八色幡)’, ‘구색번(九色幡)’, ‘잡색번(雜色幡)’ 등의 명칭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색을 하나의 번에 담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개 번을 각기 다른 색으로 만들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번도 이에 해당합니다. 번의 윗부분에는 원래 이를 걸 수 있는 고리가 달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은 흥미롭게도 번 안에 그린 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색 번(본관4020) 속의 보살이 들고 있는 봉 위에는 삼각형으로 생긴 번두(幡頭) 위에 달린 고리로 건 번이 보입니다.
번에 그림을 그린 화가의 실력은 문양보다는 보살 표현에 잘 드러납니다. 육감적인 몸, 화려한 장신구, 휘날리는 천의(天衣)에서 당대(唐代, 618~907) 보살의 전형적 표현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7~8세기 불화에 보이는 팽팽하고 탄력 있는 선과는 달리 선에는 긴장감이 없으며 옷자락도 아래로 처지거나 늘어진 느낌입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번은 당 말기나 오대(五代, 907~960)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연대가 있는 비교 자료로는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소장의 현덕(顯德)3년(956) 번(1919,0101,0.216)이 있습니다. 붉은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옅은 붉은색을 더해 입체감을 표현한 방식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번(본관4025)와 매우 유사합니다.

보살을 그린 번(세부), 둔황, 10세기, 견에 채색, 323×7cm, 본관4020 보살을 그린 번(세부),
둔황, 10세기,
견에 채색, 323×7cm,
본관4020

보살을 그린 번(세부), 둔황, 10세기, 견에 채색, 191.5×25.2cm, 본관4022보살을 그린 번(세부),
둔황, 10세기, 견에 채색, 191.5×25.2cm
본관4022

보살을 그린 번(세부), 둔황, 현덕3년(956), 396x59cm, 영국박물관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보살을 그린 번(세부), 둔황, 현덕3년(956), 396x59cm, 영국박물관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번에 담은 바람

둔황에서 발견된 번에 남아 있는 발원문(發願文)을 보면, 병이 낫기를 바라고, 장수를 기원하며, 복(福)을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원자들이 번을 제작하면서 자신들의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때로는 번 자체를 병이 낫고 수명이 연장되기를 기원하는 의례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현덕3년(956)의 번은 이러한 맥락에서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담은 발원문에는 해당 번을 가리켜 ‘49척의 번(四十九尺飜)’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절은 『관정경(灌頂經)』의 약사불(藥師佛) 신앙 관련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살을 그린 번(본관4025의 세부)보살을 그린 번(본관4025의 세부)

여기에는 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승려를 초청하여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 재계(齋戒)하고, 49번 경전을 독송하고, 7층으로 이루어진 등(燈)을 밝히고, 수명을 연장해주는 오색(五色)의 신번(神幡)을 걸 것을 권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때 그 번의 길이를 ‘49척’으로 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번을 공양하는 것은 약사불 신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이에 대한 구체적 지침은 『관정경』을 비롯하여 『불설약사여래본원경(佛說藥師如來本願經)』,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七佛本願功德經)』 등 약사불 신앙을 설하는 경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번의 길이는 3.96m로 14m에 가까운 49척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원래는 더 긴 형태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7과 그 배수인 49가 반복하여 등장하는 경전의 내용을 볼 때, ‘49’는 실제 길이가 아닌 상징적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번에는 어떤 바람이 담겨 있었을까요? 동일한 시기의 유사한 자료와 비교할 때 병이 낫고, 수명이 연장되기를 바라고 약사불 관련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지만, 발원문이 남아 있지 않아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글씨는 현덕3년 번과 유사한 형태의 번(본관4025)에 있는 보살의 이름뿐입니다. 위쪽의 보살은 가사를 걸친 채 왼쪽을 향하고 있고, 아래쪽 보살은 군의(裙衣)를 입고 천의를 걸친 채 정면을 향해 서 있습니다. 위쪽 보살 옆에는 ‘나무(南無)’, ‘보살’이라는 명칭만 확인할 수 있으며, 아래 보살에는 ‘나무불휴식보살(南無不休息菩薩)’이라는 글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보살의 이름은 아마도 쉬지 않고 정진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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