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부여 군수리(軍守里) 석불좌상(石佛坐像),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나온 불·보살상 : 이인영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부여읍 군수리에 있는 한 절터를 조사할 때 목탑이 있던 자리의 심초석 부근에서 불・보살상이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목탑지 심초석은 부여 능산리 절터(陵寺, 567)나 왕흥사(王興寺, 577) 터 등 여러 백제 불교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군수리 절터 심초석은 정방형으로 지하 약 1.8m 깊이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의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절터임이 밝혀졌으며, 따라서 이 불・보살상은 삼국시대 백제 불교조각으로서 출토지와 국적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조각・공예관 불교조각실에 상설 전시하고 있으며, 군수리 절터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1번지로서 사적(옛 지정번호 사적 제44호)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석불좌상, 백제 6세기 중엽, 높이 13.5㎝, 보물 석불좌상, 백제 6세기 중엽, 높이 13.5㎝, 보물

금동보살입상, 백제 6세기 중엽,  높이 11.2㎝, 보물 금동보살입상, 백제 6세기 중엽, 높이 11.2㎝, 보물

백제 사비 시기(泗沘時期, 538~660), 불교가 크게 융성하다

백제는 공식 기록상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 384)에 중국 남조(南朝)인 동진(東晋)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 왕은 도성 밖까지 나가 그를 맞이해 궁에 들이고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듬해 2월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승려 열 명을 두는 등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불사(佛寺)의 유구는 전혀 남아있지 않아 불교 수용 초기의 모습이나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이후 475년 9월, 고구려 군이 백제 왕도(王都)인 한성(漢城)을 점령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살해함에 따라,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가 웅진(熊津, 현 공주)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왕(聖王) 16년(538)에는 다시 사비(泗沘, 현 부여)로 천도하였습니다. 백제는 사비 천도를 전후해 대대적으로 도성과 시설물을 새로이 축조하고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등 왕권 회복과 지배체제 확립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로써 사비는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무릇 123년 간 백제의 마지막 왕도로서 화려한 문화와 예술을 활짝 꽃 피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불교 역시 초기 수용 단계를 벗어나 도성 안팎으로 대규모 사찰 건립과 많은 불사가 이루어지고 높은 수준의 다양한 미술품들이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성왕(재위 523~554) 대에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사비 천도한 해에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보내 불교를 전하고 노반박사(露盤博士)・와(瓦)박사・화공(畫工) 등을 파견하였습니다. 중국 사서에도 “승려와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僧尼寺塔甚多]라고 한 것은 당시 백제 불교가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잘 전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여 지역에서 많은 수의 백제시대 절터가 밝혀졌는데, 도성 중심에 위치한 정림사(定林寺)를 비롯해 동・서 외곽에 창왕(昌王)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544년, 현 옥천)에서 비참하게 전사한 부왕인 성왕을 위해 창건한 능사(陵寺, 567년)와 죽은 왕자를 위해 창건한 왕흥사(577년)는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조성한 대규모의 왕실 발원 사찰이었습니다. 현재 확인된 절터는 대략 30여 곳이 넘는데 이 가운데 군수리 절터는 사비 시기 가장 이른 초기 유적에 속하며, 가람배치나 출토된 막새기와 등으로 미루어 6세기 전반~중반 무렵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扶餘軍守里寺址》Ⅰ・Ⅱ, 2010・2013 참조)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백제는 대체로 6세기 후반 무렵에는 백제적인 특징을 갖춘 문화를 확립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 중국 남북조 및 고구려・신라는 물론 왜와도 적극적인 교류를 하여 국제적인 문화를 이루었으며, 특히 일본 고대 아스카문화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정인(禪定印) 불좌상(佛坐像), 우리나라 초기 불상(佛像)의 모습

석불좌상

석불좌상 후면

금동불좌상, 백제 6세기, 높이 13.9cm, 부여 신리

금동불좌상, 백제 6세기, 높이 13.9cm, 부여 신리

석불좌상의 높이는 13.5cm이고 금동보살입상의 높이는 11.2cm로 아주 작지만, 두 경우 모두 우리나라 초기 불・보살상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상은 두 손을 복부 앞에서 앞뒤로 포개어 선정인(禪定印)을 하였는데 손바닥이 위로 향한 보통의 형태와 달리 손등이 밖에서 보이도록 표현하였습니다. 선정인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위해 선정에 들었을 때의 손 갖춤으로, 인도 초기 불상을 비롯해 중국에서도 4~5세기 초기에 유행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6~7세기 불상에 많이 표현하였습니다. 부여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역시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사각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웅크리듯이 앉아 있는 모습은 고요히 선정에 든 상태를 인상적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가슴 부분의 두터운 옷깃 아래로 U자형 옷 주름이 복부 밑으로 흘러내려 대좌 전체를 뒤덮은 상현좌(裳懸座)는 매우 장식적이며 화려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상현좌는 불 좌상에서 옷자락이 대좌를 덮어 내린 형식으로, 청양에서 출토된 도제불상대좌(陶製佛像臺座)는 하단 폭 2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크기의 웅장함과 함께 세련된 조각기법이 단연 돋보이는 걸작입니다. 상현좌는 보통 인도 간다라 불상을 비롯해 중국 용문석굴 등 북위는 물론 남조 불상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도제불상대좌, 백제 7세기, 하단 폭 250cm, 충남 청양

도제불상대좌, 백제 7세기, 하단 폭 250cm, 충남 청양

특히 불상은 곱돌이라고도 하는 무르고 매끄러운 재질의 활석(滑石)으로 만들어 한층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활석은 인근 지역에서 산출되는 까닭에 부여 부소산 반가상, 불보살병입상 등 백제 불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금동보살입상 역시 불상과 마찬가지로 앞면만 조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금도금이 잘 남아 있습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얼굴 양 옆으로 머리카락[보발, 寶髮]과 관의 띠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몸체 양 옆으로 뻗친 옷자락이나 무릎 위치에서 교차하는 두터운 천의자락, 끝이 뾰족한 목걸이 등은 초기 보살상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입니다.

군수리 불상은 대체로 4~5세기 중국 불상과 비교할 수 있으나,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표현 등은 이미 백제화된 양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 수용 이후 5세기까지는 확인된 불교조각이 없어 공백기로 남아있는 가운데, 본격적인 조상 활동이 이루어지는 6세기 중엽 경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초기 불교조각으로서, 이후 다른 불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편년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즉 명문이 있는 고구려 현존 최고 불상인 연가명 금동불입상(539)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의 서두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나, 한편으로는 고구려 연가명 금동불입상의 대담한 생략과 힘찬 조형성과 비교하면 군수리 불상의 둥글고 부드러운 백제 특유의 양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여(扶餘) 군수리(軍守里) 절 터, 발굴과 조사

부여읍은 오늘날 부여군청이 위치한 중심지역이며 남쪽으로 장암면, 서쪽으로 규암면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변에는 동쪽으로 백제 무왕(武王, 재위 640~641) 때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궁남지(宮南池, 옛 지정번호 사적 제135호)를 비롯해 다양한 백제 사비시기 유적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군수리 절터에 대한 최초 조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5~1936년 조선총독부 지시로 총 2차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즉 1935년 조선고적연구회에서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에 부여연구소를 설치하고 후지사와 카즈오(藤澤一夫)가 중심이 되어 백제 고분・성지・절터 등을 조사하였는데, 군수리 일대 지표조사에서 백제 기와 편・초석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고적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약 한달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 1894~1977)가 팀장으로, 총독부 촉탁 사이토 다다시(齊藤忠)가 보조로 발굴에 참여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일직선으로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임을 처음 확인하였으며, 금동제 광배 편・와전류 등 다양한 종류의 출토품과 함께 불・보살상 2점도 이 때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사 내용은 이시다 모사쿠가 간략히 정리하여 보고서에 수록하였습니다.(〈扶餘軍守里廢寺址發掘調査(槪要)〉 《昭和11年度 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1937)

그러나 이 시기의 조사는 정식 발굴 아닌 단기간에 이루어진 졸속 발굴이었으며 보고 내용 또한 불충분해 그간 유적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광복 이후 이 일대에 대한 정비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는 가운데, 2003년 궁남지 종합정비계획을 계기로 일제강점기 최초 조사 이후 70여 년 만에 정식으로 우리 전문 조사기관에서 재 발굴하였습니다. 즉 2005~2007년까지 총 3차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금당지・목탑지 등의 정확한 가람배치와 규모를 재확인하였고 동편 일대 유구 등을 확인하였습니다. 2011년 6차 발굴에서는 서회랑지 일대를 조사하고 북서편 건물지를 추가 확인하였으며, 수막새와 벼루 등 백제 사비시기 유물을 다수 수습하였습니다.(《扶餘軍守里寺址》Ⅰ・Ⅱ, 201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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