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비해당소상팔경시첩-15세기 문예의 정화 : 박해훈

조선 초기 시ㆍ서ㆍ화 합작의 전형을 보여주는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은 1442년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 ~ 1453)이 남송 영종(寧宗, 재위 1198 ~ 1224)이 쓴 「팔경시」의 글씨를 베껴 쓰고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그리게 하였으며 고려의 이인로(李仁老, 1152 ~ 1220)와 진화(陳澕, 1200년경 활동)의 시를 써넣고 19명에 이르는 당대의 군신(群臣)들에게도 시를 짓게 하여 두루마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영종의 글씨를 모사한 것과 <소상팔경도>는 산실되고 후대에 첩으로 개장되어 전합니다.

사진. 이영서(李永瑞, ? ~ 1450), <서문>, 《비해당소상팔경시첩》

이영서(李永瑞, ? ~ 1450), <서문>, 《비해당소상팔경시첩》, 1442년, 종이에 먹, 각 31.6 × 18.8 ~ 21.9 cm, 보물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

1442년 안평대군이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을 제작한 것은 고려 명종(明宗) 15년(1185) 왕이 문신들에게 명하여「소상팔경시」를 짓게 하고 이광필(李光弼, 12 ~ 13세기 활동)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사실을 연상케 합니다. 아마도 안평대군은 명종 때의 시화회(詩畵會)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하튼 이때의 일은 조선이 건국한 이래 왕실이 주도한 최초의 시화회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때 참여했던 19명의 문사 중에서 승려인 만우(卍雨)를 제외하고 정인지(鄭麟趾, 1396 ~ 1478), 안지(安止, 1377 ~ 1464), 안숭선(安崇善, 1392 ~ 1452), 이보흠(李甫欽, ? ~ 1457), 남수문(南秀文, 1408 ~ 1443), 신석조(辛碩祖, 1407 ~ 1459), 유의손(柳義孫, 1398 ~ 1450), 최항(崔恒, 1409 ~ 1474), 박팽년(朴彭年, 1417 ~ 1456), 성삼문(成三問, 1418 ~ 1456),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 등 11명이 집현전(集賢殿) 출신으로 세종대왕(世宗大王, 재위 1418 ~ 1450)의 문치(文治)를 뒷받침했던 쟁쟁한 문인관료들입니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에 <소상팔경도> 를 그린 인물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15세기 활동)이었던 것으로 확실시됩니다.

사진. 김종서, <오언고시(五言古詩)>,《비해당소상팔경시첩》 김종서, <오언고시(五言古詩)>,《비해당소상팔경시첩》
1442년, 종이에 먹, 제1면 31.4 × 17.6 cm
제2면 32.6 × 20.4 cm, 보물

사진. 성삼문, <오언절구(五言絶句) 8수>, 《비해당소상팔경시첩》 성삼문, <오언절구(五言絶句) 8수>, 《비해당소상팔경시첩》
1442년, 종이에 먹, 제1면 30.4 × 22.8 cm
제2면 29.2 × 17.2 cm, 보물

세종대왕의 문치 하에 안평대군의 주도와 집현전 학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은 시ㆍ서ㆍ화 삼절(三絶)의 기념비적인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5년 뒤인 1447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제작할 때에도 반복되었습니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제작에는 19명(고려의 문인 2명을 합하면 21명)의 문인이 참여하였고 <몽유도원도>의 제작에는 22명이 참여하였습니다. 두 작품의 제작에 모두 참여한 인물은 9명입니다. 그리고 <몽유도원도>를 그린 인물도 안견입니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최고의 회화로 현재까지 전해지지만,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소상팔경도>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소상팔경도>가 조선 초기 <소상팔경도>의 유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소상팔경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부근의 아름다운 경치를 여덟 장면으로 나타낸 것으로 현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상경(理想景)을 상징하였습니다.

안평대군이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을 제작한 것은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憧憬)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5년 후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이상향을 표현한 <몽유도원도>를 제작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안평대군은 꿈에 본 도원을 잊지 못하여 북악산 서북쪽 산기슭에 별장을 짓고 그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라 하였습니다. 무계정사란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는 계곡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복숭아나무 수백 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안평대군은 얼마나 이상세계를 꿈꾸고 현실에서 구현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꿈꾼 세계는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비극적 운명

조선시대 왕실에서 예술적 천분이 가장 뛰어났던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로 1418년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ㆍ낭간거사(琅玕居士)ㆍ매죽헌(梅竹軒) 등입니다. 특히 비해당이라는 호는 부왕인 세종이 하사하였는데, 안평(安平)이라는 이름이 편안하고 무사하다란 뜻이기에 안이(安易)한 점을 경계하라는 의미로서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ㆍ서ㆍ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상세계를 꿈꾸며 무계정사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도 유명합니다. 서풍(書風)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 1254 ~ 1322)의 송설체(松雪體)를 따랐습니다. 송설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유려하고 활달한 기풍은 당대 최고로 평가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초기에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가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뛰어난 천분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생장하면서 내부(內府)에 소장된 많은 진적(眞蹟)을 보고 수련하였으며, 그 스스로 서화수장에도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의 『보한재집(保閑齋集)』 「화기(畵記)」에 의하면, 모두 222축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에게 명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서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름대로 평안하고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던 안평대군에게 뜻하지 않은 불운이 찾아왔습니다. 1453년 그의 나이 36세 때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려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희생된 것입니다. 수양대군이 세조(世祖, 재위 1455 ~ 1468)로 등극한 후 안평대군은 정적(政敵)으로 몰려 강화도로 귀양보내졌다가 사사(賜死)되었으며, 그와 함께 《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몽유도원도>에 시를 쓴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등도 결국 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한순간의 광풍에 덧없이 사라졌지만 소상팔경과 몽유도원의 이상세계를 함께 꿈꾸며 풍류를 나누었던 자취는 지금까지 전해져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사진. 1 신숙주, <오언고시(五言古詩)>,《비해당소상팔경시첩》 2 박팽년, <칠언절구(七言絶句)>,《비해당소상팔경시첩》 1 신숙주, <오언고시(五言古詩)>,《비해당소상팔경시첩》, 1442년, 종이에 먹, 30.4 x 20.1 cm, 보물
2 박팽년, <칠언절구(七言絶句)>,《비해당소상팔경시첩》, 1442년, 종이에 먹, 제1면 30.3 × 20.0 cm
  제2면 29.0 × 20.0 cm,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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