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 : 이효종

만약 여러분이 어떤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면, 통치자인 여러분은 다스리는 지역에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이 살고 있으며, 병사로 징발할 수 있는 성인 남자의 수가 얼마나 되며, 여자와 어린아이가 몇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이런 관심에서 출발하여 일찍이 호적(戶籍)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적의 작성 동기가 효율적인 통치를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호적에 기재되는 내용도 각 시대마다 조금씩 바뀌었고 그에 따라 호적의 성격도 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호적은 집 또는 가족을 단위로 그 구성원의 신분과 구성원 간의 관계를 기록한 공적 문서를 말합니다.

고려 말 함경도 화령에서 작성된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

사진.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 고려 공양왕 2년(1390), 55.7 × 386.0㎝, 국보

고려시대에 작성되어 현재까지 원본 상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호적 관련 문서로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高麗末戶籍關聯文書)』(옛 지정번호 국보 제131호)가 있습니다. 이 문서는 조선 개국 2년 전인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화령(和寧)(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작성된 것입니다. 이 문서에는 이성계의 노비 및 이성계와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40호의 호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서체(楷書體)로 쓴 이 문서는 모두 8폭의 호적 관련 자료가 연결되어 세로 55.7cm, 가로 386cm인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영조 7년(1731)에 왕명으로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에 대대로 보관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졌습니다. 이 문서는 고려 말 호적 체계와 호적 작성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의 작성 배경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인 배경은 『고려사(高麗史)』권79 식화(食貨)2 호구조(戶口條)에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호적법이 있어서 양반의 경우 3년마다 호적 2본(本)을 작성하여, 하나는 관서에 두고 하나는 본인이 보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사회적인 격변으로 인해 호적법이 무너져, 양인(良人)이 강제로 천인(賤人)이 되는 등 신분제도가 혼란스러워지고 이로 인해 각종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공양왕 2년(1390)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는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호적법을 다시 시행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하였습니다.

이때 도평의사사에서는 호적 작성 원칙으로 ‘호주(戶主)의 세계(世系), 동거하는 자식ㆍ형제ㆍ조카ㆍ사위의 족파(族派), 노비가 전래된 종파(宗派) 및 소생의 이름과 나이, 노처(奴妻, 남자 종의 아내)와 비부(婢婦, 여자 종의 남편)의 양인 천인 여부’를 기록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대체로 받아들여져 그에 따라 만들어진 호적 중의 하나가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입니다.

『고려 말 호적 관련 문서』에 나타난 고려시대 사람들

전체 8폭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문서는 이성계의 노비를 기록한 <제1폭>, 호적 작성 원칙을 담고 있는 <제2폭>, 노비호를 기재한 <제3폭>, 그리고 양인호를 기재한 <제4폭~제8폭>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서 흥미로운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제1폭> 이성계의 노비를 기록한 문서

<제1폭> 이성계의 노비를 기록한 문서

이성계의 노비가 적혀 있는 <제1폭>에는 이성계의 공신호(功臣號)와 관직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은 <제1폭>의 앞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 부분은 화령부 호적대장에 의거하여 발급한 문서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건국 직전 이성계의 정치적 지위를 보여주는 자료로서도 흥미롭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화령부(和寧府) 사심관(事審官)인 이성계는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식읍(食邑) 1,000호(戶), 식실봉(食實封) 300호(戶)를 받은 당대 최고 실력자였습니다.

홍무(洪武) 23년 경오(庚午) 12월 일, 화령부(和寧府) 호구주장(戶口柱帳)의 시행(施行)임.
동면(東面) 덕흥부(德興部)
사심(事審)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 이조상서시사(吏曹尙瑞寺事)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 겸 입좌상호군(兼入佐上護軍) 영경연사(領經筵事) 화령부(和寧府) 개국충의백(開國忠義伯) 식읍(食邑) 1,000호(戶) 식실봉(食實封) 300호(戶) 이성계(李成桂).

호적 작성 원칙을 담고 있는 <제2폭>에는 도평의사사가 국왕에게 건의한 호적 작성 원칙과 이를 국왕이 수정한 호적 작성 원칙이 연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호적 작성 원칙 간의 내용 차이는 이 호적 관련 문서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우부대언(右副代言) 정순대부(正順大夫)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겸판전객시사(兼判典客寺事)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지제교(知制敎) 지공조사(知工曹事) 신(臣) 이방원(李芳遠)’이 왕명을 받들어 수정된 호적 작성 지침을 변경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방원이 호적의 시행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나머지 <제3폭~제8폭>에는 이성계와의 관련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40호의 호적(양인호<25호>, 노비호<15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호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실제 삶을 조명할 수 있는데, 이들 호 가운데 신분별로 각각 한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의 것은 노비호의 사례이고, 뒷의 것은 양인호의 사례입니다.

사진. 1 <제3폭> 노비 김상좌(金上左) 호의 호적 2 <제4폭> 양인 장덕보(張德寶) 호의 호적

1 <제3폭> 노비 김상좌(金上左) 호의 호적
2 <제4폭> 양인 장덕보(張德寶) 호의 호적

호(戶) 전 판사(前判事) 박충용(朴忠用)의 호노(戶奴)인 김상좌(金上左)는 나이가 44세이고, 김상좌의 처(妻) 재신(宰臣) 고한(高閑)의 호비(戶婢)인 감물이(甘勿伊)는 나이가 42세이다. 동호(同戶) 호별노(戶別奴)인 김원(金元)은 나이가 42세이고, 김원의 처(妻) 재신(宰臣) 김원(金元)의 호비(戶婢)인 호기(好奇)는 나이가 42세이다. 동호(同戶) 호별노(戶別奴) 가이(加伊)는 나이가 27세이고, 가이의 처(妻) 동호비(同戶婢) 눌근이(訥斤伊)는 나이가 20세이다.

호(戶) 전 비순위 정용중랑장(前備巡衛精勇中郞將) 장덕보(張德寶)는 나이 45세, 본관 울진(蔚珍), 아버지 영동정(令同正) 장심(張心) <사망>, 할아버지 산원동정(散員同正) 장연(張延), 증조할아버지 산원동정(散員同正) 선로(善老), 어머니 이태(伊大) <사망> 본관 울진[同村], 외할아버지 호장(戶長) 임화상(林和尙)이다. 호(戶) 처(妻) 연지(延之)는 나이 44세, 본관 통주(通州), 아버지 영동정(令同正) 김영좌(金英佐), 할아버지 검교호군(檢校護軍) 김위(金位), 증조할아버지 영동정(令同正) 광문(光文), 어머니 양의부이(良衣夫伊), 외할아버지 이신평(李臣平) 본관 성주(城州)이다. 병산(幷産) 1남 장송(張松)은 나이 10세이고, 1녀 부덕(夫德)은 나이 8세이고, 2녀는 건이가이(件伊加伊)는 나이 5세이다. 인(印)<제4폭>

두 신분의 호적을 비교하면, 양인호와 노비호는 기록하는 방식에 있어 다소 차이가 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비호에는 주인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데 비해, 양인호에는 호주(戶主)의 세계(世系)를 파악하는 데 주목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노비호의 호주인 김상좌(金上左)는 ‘전 판사(前判事) 박충용(朴忠用)의 호노(戶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그의 처 감물이(甘勿伊)가 다른 사람의 노비라는 사실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양인호의 호주인 장덕보(張德寶)는 자신의 직역, 이름, 나이, 본관, 아버지ㆍ할아버지ㆍ증조할아버지ㆍ외할아버지의 직역과 이름, 어머니의 이름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분별로 다르게 기록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호적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호마다 큰 글씨로 ‘호(戶)’라는 단어를 표기하거나, 양인호에서 처(妻)의 이름을 기록되어 있는 것은 조선시대와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가가 구성원을 파악하는 방식이나 여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 고려ㆍ조선 두 사회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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