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의 나한도 : 박혜원

나한이란 무엇인가

‘나한(羅漢)’이란 ‘아라한(阿羅漢)’을 줄여서 이르는 말입니다. 치열한 수행을 통해 생사를 초월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영원한 지혜를 얻은 자가 ‘아라한’, 즉 ‘나한’입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부처가 가진 열 가지 명칭인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중 ‘응공’이 바로 아라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라한이 산스크리트어의 음을 따서 번역한 말이라면, 응공은 뜻을 따라 번역한 말로 ‘세상의 공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부처뿐 아니라 부처의 제자로서 수행이 뛰어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도 나한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한은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세상에 남아 불법(佛法)을 지키고 중생을 제도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열 여섯 명의 제자는 십육나한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정리하고자 모인 제자 오백 명은 오백나한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사찰의 나한전 등에 모셔져 예배를 받는 나한 역시 대부분 십육나한 또는 오백나한입니다.

사진. <제15 아대다존자> <제15 아대다존자>,
고려 13세기, 비단에 엷은 색, 53.5×39.5cm, 보물, 덕수6061

사진. <제357 의통존자> <제357 의통존자>,
고려 1235-6년, 비단에 엷은 색, 52.5×36.8cm, 보물, 덕수6060

고려시대의 나한도

우리 나라에서도 불교가 전해진 이래 나한에 대한 신앙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적 신앙으로서 발전하면서 나한 신앙이 매우 성행하였습니다.『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태조 6년(923)에 후량에 간 사신이 오백나한의 그림을 가져와 해주의 숭산사에 봉안하였고, 도성 내의 보제사에도 오백나한을 모시는 나한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보제사에서 나한을 모시는 의식인 나한재가 여러 번 개최되었고, 그 외에 도성 안팎의 여러 사찰에서도 나한재가 개최되었습니다.

여기 소개되는 고려시대 나한도 역시 이러한 나한 신앙의 일환으로 그려졌을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는 대체로 세밀하고 화려한 채색을 자랑하는 데 비해, 이 나한도들은 수묵의 필선을 살려 담담하게 표현한 점이 눈에 띕니다. 어쩌면 많은 나한을 빨리 그려내기 위하여 다른 고려불화보다 크기도 작게 하고, 세밀한 채색보다는 담백 간결한 수묵을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한 폭당 한 명의 나한을 그린 이 나한도는 당시에는 십육나한과 오백나한 등을 그린 오백 점 이상의 세트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다고 알려진 것은 13점 정도로 한국, 일본, 미국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습니다. 각각의 크기는 약간씩 다르지만, 대부분 수리하거나 새로 장황하는 등의 과정을 거친 것을 고려하면 본래 가로 45cm, 세로 65cm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진. 아대다존자의 얼굴 아대다존자의 얼굴

사진. 아대다존자의 제자 아대다존자의 제자

수행과 깨달음을 그리다

아담한 화면에 그려진 제15 아대다존자(阿代多尊者)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머리는 삭발하였지만, 뒷머리로 갈수록 희어지는 색깔은 이 수행자의 나이 많음을 한눈에도 드러냅니다. 흰 눈썹은 아래로 처져 있고, 이마와 눈가, 목 둘레에는 주름이 가득합니다. 아무렇게나 두른 대의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오른쪽 어깨와 팔은 야위었으며, 두 손을 모아 지팡이를 짚은 것이 힘겨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아마 나한이라는 영광된 자리에 오르기까지, 출가한 구도자의 엄중하고 고된 수행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내 번뇌를 깨뜨리고 더 배울 것이 없는 위치에 오른 자의 영광을 보여주듯 존자의 머리 뒤에는 큰 원광이 있습니다. 먹의 농담으로 그려졌지만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이 두광 속에서 존자는 시선을 낮게 드리우고,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는 몸을 숙여 들으며 집중하려 애쓰는 젊은 승려가 있습니다. 존자에 비해 훨씬 작게 그려진 체구는, 이 사람이 위대한 나한이 아니라 아직 구도의 길 위에 있는 승려임을 알려줍니다. 존자는 젊은 제자에게 마치 수행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진. 의통존자의 얼굴 의통존자의 얼굴

사진. 의통존자의 손 의통존자의 손

한편 또다른 나한도에 그려진 제357 의통존자(義通尊者)는 왼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이 존자 역시 푹 패인 뺨, 옷섶 사이로 드러난 야윈 목에서 그의 나이와 고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존자는 아직도 철저한 수행을 고집하는 듯 바위 위에 앉아 있습니다. 꼿꼿하게 편 허리, 단정한 가부좌, 손가락 하나조차도 아무렇게나 두지 않는 자세에서 흐트러짐 없는 수행자의 몸가짐이 드러납니다. 길게 드리워진 눈썹, 치켜뜨거나 노려보지 않으면서도 마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듯 매섭고 날카로운 눈매 역시 존자의 깨달음의 깊이를 가늠하게 합니다. 망설임 없이 그려나간 숙련된 붓질은 존자의 얼굴에 미묘한 운동감을 주어, 마치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게으른 제자들을 꾸짖을 것만 같습니다. 법을 구하는 자라면 몸과 마음에 아주 작은 흐트러짐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사진. <제427 원원만존자>중 화기 부분

<제427 원원만존자>중 화기 부분, 고려 1236년, 비단에 엷은 색
화기에 드러난 기원

그러나 구도와 수행, 깨달음의 경지를 웅변하는 듯한 이 나한도에는, 사실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인 기원이 깃들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일부 나한도의 아랫 부분에 남아 있는 화기에는 ‘국토대평(國土大平)’, ‘성수천장(聖壽天長)’, ‘태자천재(太子千載)’, ‘영수만년(令壽萬年)’, ‘인병속멸(隣兵速滅)’ 등의 기원이 적혀 있습니다. 즉, “나라가 태평하고, 임금은 하늘처럼 오래 사시고, 태자는 천년을 사시고, 왕비는 만년토록 오래 사시며, 외국 군대가 속히 멸하기를 바랍니다” 와 같은 기원을 담아 이 나한도를 그린 것입니다. 나라와 왕실이 평안하고 인접 국가의 군대가 속히 멸하기를 바라는 기원문의 내용을 통해, 나한의 신통력을 빌어 현실의 평안과 재앙의 소멸을 기원했던 당시의 나한 신앙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부처는 스스로를 의지하여 깨달음을 구하라고 하였건만, 이들이 나한에게 세속적인 구원을 기원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수행과 깨달음은 숭고하지만 중생에게는 멀고도 힘든 길인 반면, 눈앞에 닥친 외적의 침략,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가깝고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나한의 위대한 모습과 그 아래에서 엄숙한 불화의 한쪽 자락을 붙들고 삶의 환란을 피하고 싶은, 너무나 인간적인 소망의 대조 같은 것을 이 나한도를 보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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