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노동동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 김현희

사진. 경주 노동동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경주 노동동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신라, 5세기, (좌∙우)길이 32.0 cm
신발을 신고 저승으로 가다....

신라인들은 거대한 무덤 속에 살아생전의 부귀영화를 내세에서도 고스란히 누리기 위해 갖가지 물건들을 넣어두었습니다. 이러한 장례 풍습 때문에 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의 화려한 물품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지배자 층은 죽는 순간에도 금관, 금 허리띠, 금 귀걸이, 금 팔찌 뿐만 아니라 금을 입힌 신발까지 온몸을 금으로 휘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양한 무늬들로 가득 찬 금동신발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발견되었습니다. 신라, 고구려, 백제를 통 털어 금동신발 중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위치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신라만 금동신발을 넣었을까요?

예로부터 신발이라는 것은 신고 어디론가 떠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위세가 당당했을법한 무덤 속에서는 신발이 확인되곤 합니다. 이 신발을 신고 저승으로 고이 가시라는 남은 이들의 바람이 담긴 것일까요?

신라 무덤에서 확인되는 신발은 대개 금동신발이며, 대략 27켤레 정도 확인되었습니다. 황남대총(남분, 북분), 천마총,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식리총과 같은 큰 봉분을 가진 무덤 뿐만 아니라, 경주 주변 지역인 양산, 대구 달서, 의성 탑리의 무덤에서도 금동 신발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금동신발은 무덤에 매납된 다양한 황금장신구들과 마찬가지로 피장자의 정치⋅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금동신발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확인됩니다.

고구려 금동신발은 집안 지역의 무덤인 우산묘구(禹山墓區), 마선묘구(麻線墓區), 칠성산묘구(七星山墓區)에서 확인되며, 주로 신발 바닥면만 남아 있고 바닥에 금속제 못을 박아 넣는 특징이 보입니다. 백제 금동신발은 백제의 최상급 무덤에서 약 14켤레 정도 확인되었습니다. 신발의 제작 방법을 살펴보면 신발의 좌우 측판이 앞과 뒤에서 각각 결합되고 바닥에는 금동 못이 박혀 있으며 凸자무늬, 용무늬, 능형무늬, 거북등무늬, 초화무늬 등 다양한 무늬가 베풀어져 있습니다. 최근 고창 봉덕리에서 확인된 금동신발에는 용무늬, 사람얼굴에 새의 몸을 한 가릉빈가 무늬,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확인되는 역사상(力士像), 봉황과 같은 길상조(吉祥鳥) 등의 무늬가 6엽의 연꽃무늬와 어우러져 맞새김되어 있습니다.

금동신발은 주로 피장자의 발에 신겨져 있거나 발 근처, 목관 동쪽에 마련된 부장궤에서 출토됩니다. 백제의 무령왕릉이나 신촌리 9호분의 경우는 피장자의 발에 직접 착용시킨 사례입니다.

신라의 금동신발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신라의 금동신발도 백제의 것과 마찬가지로 3판의 금속판을 결합하여 만듭니다. 다만 백제의 금동신발처럼 좌우 측판이 앞·뒤에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앞판과 뒤판이 옆에서 결합된다는 차이를 보입니다. 즉 발등을 감싸는 두 개의 판이 옆에서 겹친 후 세로로 금동 못을 박아 고정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바닥에는 금동 못을 부착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신라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의 경우 뒤꿈치부분이 남아있지 않고 바닥판만 있어 전체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만 신발 바닥판의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발에 고정하기 위한 끈 등을 연결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닥판에는 사각추 형태의 금동 못이 박혀 있어 고구려 금동신발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황남대총 남분의 경우 凸자 무늬에 영락을 매단 금동신발 안쪽 바닥에서 마(麻)에 붉은색 비단을 감싼 직물 흔적이 확인되어 금동신발 자체만을 신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凸자 무늬를 투조하는 방법도 다른데, 백제의 경우는 凸자 무늬를 동일한 방향으로 하는 반면, 신라의 신발에는 凸자 무늬를 맞물리게 배치합니다.

금관보다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금동신발이 발견되다

사진. 유물 출토상태

유물 출토상태

일제강점기인 1924년, 금관총이 발견됨에 따라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 조사된 무덤이 노동동 126호분이었습니다. 봉분은 거의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았지만, 남아있는 부분의 지름은 약 20m, 높이 약 5m 정도였기 때문에 원래의 지름은 약 30m, 높이 6m 정도의 중형급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부곽이 마련되지 않은 단곽 형태의 무덤으로 동서 방향으로 놓인 목관에는 주칠(朱漆)이 되어 있고 금박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머리 위쪽에는 유물 부장용 상자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목관 내에서 백화수피제 관모, 금 귀걸이, 옥 목걸이, 은 허리띠, 금은 장식대도 등이 출토되었고, 피장자의 발 근처인 덩이쇠[鐵鋌]가 놓인 부분에서 금동신발 1켤레가 출토되었습니다. 머리 위쪽 부장용 상자에서는 다양한 금속 용기, 토기, 말갖춤, 큰칼, 철제 무기, 칠기류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금관을 무색하게 할 만큼의 화려한 무늬들로 뒤덮인 금동신발의 등장으로 이 126호 무덤의 이름은 식리총(飾履塚)이라고 붙여졌습니다. 즉 식리(飾履)가 신발이라는 뜻입니다. 이 금동신발은 3매의 금동판으로 이루어졌으며, 앞판과 뒤판이 측면에서 결합되는 전형적인 신라 금동신발 제작방법과는 다른 백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좌우 측판이 앞과 뒤에서 결합되는 방법으로 3매의 금동판은 갖가지 무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본적인 무늬 구성은 바깥 라인쪽에 불꽃무늬, 안쪽에는 거북등무늬로 구획한 후 그 안에 다양한 동물과 새무늬 등을 배치하였습니다.

좌우 측판의 동물무늬에는 현무, 주작, 호랑이 등이 확인되고, 특히 발뒤꿈치부분에는 용무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가장 화려한 무늬가 배치된 바닥판의 경우, 뿔을 가진 도깨비,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새, 날개 달린 물고기,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가진 가릉빈가 등 상상속의 동물무늬, 11개의 연꽃무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무늬들은 장생불사(長生不死)나 벽사(辟邪)의 뜻을 금동신발에 담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죽은 이가 편안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긴 것입니다.

사진. 식리총 발굴조사 모습 식리총 발굴조사 모습

사진. 금동신발 출토 상태 금동신발 출토 상태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여백이 없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무늬들로 만들어진 식리총의 금동신발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새겨 넣었을까요? 계획적인 배치 구조와 섬세한 표현으로 보아 밀랍을 이용한 주조방법으로 기본적인 틀을 만들고 세부적인 표현은 금동판에 직접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금관을 대신할 만큼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 금동신발은 신라의 제작기법이 아닌 백제지역의 제작방법이나 무늬 배치와 유사한 것이 특징입니다.

  • 사진. 연꽃무늬

    연꽃무늬
  • 사진. 마주보고 있는 새무늬

    마주보고 있는 새무늬
  • 사진. 가릉빈가 무늬

    가릉빈가 무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식리총 금동신발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