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간돌검 : 윤지연

돌로 만든 청동기시대의 상징물

간돌검은 점판암이나 혈암 등의 돌을 갈아서 만든 칼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이며 마제석검(磨製石劍)이라고도 합니다. 형태를 살펴보면, 검신(劍身)이 곧고 길게 뻗어 있고 양 옆에 날이 서 있습니다. 횡단면 형태는 긴 마름모꼴 또는 볼록렌즈 모양입니다. 길이는 대부분 30 cm 내외인데, 길이 60 cm 이상 되는 긴 돌검도 있고, 길이 15 cm 정도의 짧은 것도 있습니다. 청도 진라리에서 출토된 돌검은 길이가 67 cm에 이르는 반면,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돌검은 길이가 34 cm 정도입니다.

사진. 간돌검 간돌검, 청도 진라리, 청동기시대, 길이 67 cm

사진. 간돌검 간돌검, 부여 송국리, 청동기시대, 길이 34 cm

청동기시대에도 석기를 사용했을까요?

청동기시대가 되면 금속으로 된 도구와 꾸미개 등이 등장합니다. 청동기시대라는 명칭 자체는 금속 재질이 이용된 시기임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금속 제품이 일상생활에서 널리 이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금속은 귀한 재료였고 이를 가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금속 제품은 꾸미개나 의기(儀器) 등 지배자의 상징물로 이용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짓는 등 일상적인 활동에는 돌로 만든 석기가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석기는 이전 시기인 신석기시대의 석기보다 오히려 종류가 다양해지고 양이 많아지는 특징을 보입니다. 제작 방법과 돌을 다루는 기술 또한 발전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는 전체를 갈기보다 도끼의 날 등 일부 필요한 부분만 갈아서 도구를 만들었지만, 청동기시대에는 석기 전체를 매끄럽게 갈아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간돌검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간돌검은 손잡이 부분의 모양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됩니다. 자루가 있는 것을 자루식[有柄式] 돌검이라 하고 자루가 없는 것은 슴베식[有莖式] 돌검이라 합니다. 자루식 돌검은 손에 쥘 수 있는 자루 부분이 검신(劍身)과 일체형으로 제작된 것인데, 이는 다시 자루에 홈이 있어 상하로 구분되는 홈자루식[二段柄式]과 홈이 없어 상하가 구분되지 않는 맨자루식[一段柄式]으로 구분됩니다.

사진. 홈자루식 돌검 홈자루식 돌검, 예산 동곡리, 청동기시대

사진. 맨자루식 돌검 맨자루식 돌검, 부여 송국리, 청동기시대

슴베식 돌검은 손잡이를 분리형으로 제작하여 자루를 끼울 수 있는 슴베[莖]가 있는 것입니다. 자루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나무 자루가 끼워진 채로 남겨진 돌검이 송국리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예로, 대부분은 자루가 없이 검신(劍身)만 발견됩니다. 이로 인해 슴베식 돌검 중에는 돌창[石槍]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또한 자루식 돌검과 슴베식 돌검은 검신(劍身)에 세로로 된 두 줄의 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는데, 이러한 홈을 피홈[血溝]이라 합니다. 피홈은 돌검으로 대상을 찔렀을 때 피가 흘러나오는 틈을 확보함으로써 칼을 쉽게 뺄 수 있도록 한 실용적 장치로, 청동기시대 동검(銅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진. 슴베식 돌검 슴베식 돌검, 전 청양 아산리, 청동기시대, 길이 17 cm

사진. 피홈 피홈, 예산 동곡리, 청동기시대

무엇에 사용했을까요?

사진. 간돌검

간돌검, 김해 무계리, 청동기시대, 길이 46 cm

간돌검은 주로 돌널무덤[石棺墓]과 고인돌[支石墓] 등 무덤의 껴묻거리[副葬品]로 사용되었지만 생활 유적인 주거지에서 출토되기도 합니다. 돌검 중 일부는 손잡이 상하 부분이 과장되게 돌출되어 실제 사용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의기화(儀器化)된 돌검과 달리, 날 부분에 사용 흔적이 있거나 부러진 것을 재가공한 흔적이 있는 것들도 있어 실생활에 사용된 돌검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간돌검의 정확한 용도를 알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베고 자르고 찌르는 실용적인 칼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개인 무기로서의 기능도 있었을 것이고, 계층 사회에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기능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세를 위한 의례적 기능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규모가 큰 무덤과 주거지에서 간돌검이 주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간돌검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었던 일상품이 아니라 일부 권력을 가진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위세품(威勢品)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동기시대 지배계층의 지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로는 동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검이 귀하던 당시에는 돌검 역시 소유한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여수 오림동 고인돌을 들 수 있는데, 이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커다란 돌검과 함께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비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있어 당시 돌검이 가지고 있었던 상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는 슴베가 길고 폭이 좁으며 피홈이 있는 슴베식 돌검이 주로 발견되고, 전라도와 경상도 등 남부 지역에서는 자루식 돌검이 주로 출토됩니다.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 등 중부 지역에서는 자루식과 슴베식 돌검이 모두 발견됩니다. 간돌검은 우리나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일본 큐슈 지역에서만 출토되며,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 중 한반도에서 가장 발달했습니다. 이로 보아 한반도 자체에서 간돌검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간돌검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슴베식 돌검 중 피홈이 있는 것은 한국식동검[細形銅劍]과 모양이 유사하게 보이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이에 착안하여 한국식동검을 모방해서 슴베식 돌검이 만들어지고 그 뒤에 자루식 돌검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식동검 모방설은 금석병용기론(金石竝用期論)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파주 옥석리, 천안 두정동, 여주 흔암리 등의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슴베식 돌검이 한국식동검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자루식 돌검이 슴베식 돌검보다 더 오래된 형식이라는 사실이 판명되면서 한국식동검 모방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비파형동검 모방설, 중국식동검 모방설, 오르도스동검 모방설 등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었으나 무엇이 간돌검의 원형(原形)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간돌검은 지배계층의 상징물로서 청동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습니다. 간돌검은 철기시대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간혹 확인되기도 하지만, 철기문화가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간돌검이 지니고 있던 지배계층의 상징성은 이후 한국식동검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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