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이채 초상 : 이수미

조선 후기에 활약한 문인 이채(李采, 1745~1820)가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반신 초상화입니다.

문인이자 관리였던 이채

<이채 초상>의 주인공인 이채(李采, 1745~1820)는 조선 후기에 활약한 문신으로서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자는 계량(季良), 호는 화천(華泉)입니다. 그는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문인으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입니다. 이재는 노론 중에서도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한 낙론(洛論)의 입장에 섰습니다.

이채는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제수되었습니다. 그 뒤 사헌부ㆍ호조ㆍ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주부를 지냈습니다. 음죽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가업을 계승하는데 힘썼습니다. 1790년(정조 14) 다시 벼슬길에 올라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및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습니다. 저서로『화천집(華泉集)』16권 8책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입니다.

사진. <이채 초상(李采 肖像)>

<이채 초상(李采 肖像)>, 조선, 1802년, 비단에 색, 98.4 × 56.3 cm
어떤 옷을 입느냐, 심의와 동파관

58세의 이채는 동파관을 쓰고 심의를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심의는 선비가 평소에 착용하는 복식으로 주자학의 전래이후 유학자들이 많이 입었습니다. 주로 흰 천으로 만드는데 직령(直領)으로 된 깃과 단, 도련 둘레에 검은색 선(襈)을 둘렀습니다. 심의를 입을 때는 사(紗)로 만든 검정색 복건(幅巾)을 쓰고 띠를 맸는데 흰색 바탕의 선과 복건의 검은 색이 엄정한 학자의 자세를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차림의 대표적인 초상화는 <송시열 초상>입니다. 송시열은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은 성리학자로서 <주자상(朱子像)>의 모습을 따라 심의와 복건을 착용하여 엄격하면서도 단순한 미감과 성찰적인 자세가 강조되었습니다.

사진.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조선 후기, 비단에 색, 89.7 × 67.6 cm, 국보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을 초상으로 그릴 때 어떤 복식을 입고 있느냐는 인물의 정체성과 지향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품계를 알려주는 관복과 흉배, 각대를 착용하여 인물의 관료적 위상을 드러낼 것이냐 아니면 간소한 평상복 차림으로 질박한 조형과 자기 반성적 수양 의지를 내세울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채는 송시열식의 복식인 복건과 심의 대신 동파관과 심의를 착용하였습니다. 동파관은 선비들이 평소에 쓰던 관으로 말총으로 만들며 한가운데 관이 서고 좌우에 조금 작은 관식(冠飾)을 붙인 것이다.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이 썼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동파관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뒤에서 원문을 소개하겠지만 초상화 위에 글을 쓴 이채는 자신의 관을 정자관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자관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집안에서 즐겨 착용하던 관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산(山)자형을 2단 혹은 3단으로 튀어나오도록 만들어 동파관과는 그 모양에 차이가 있습니다.

가슴에는 백색 포대(包帶)를 고름 위치에서 고정시키고 가장자리에 검은 선을 두른 포대를 리본 모양으로 매고 그 위에 오방색(五方色) 실로 무늬를 넣어 짠 광다회(廣多繪) 띠를 드리웠습니다. 흑백의 대조를 이루던 <송시열 초상>과 비교하면 오방색의 광다회가 곁들어져 보다 화사하고 장식적인 느낌이 가미된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정면상

<이채 초상>에서 첫눈을 사로잡는 것은 정면을 바라 보고 있는 눈동자입니다. 동자 주변의 홍채에 노란색을 칠하여 눈동자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는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간간이 찾아 볼 수 있지만 주류는 역시 약간 옆을 향하고 있는 초상의 자세였습니다. 정면상의 장점은 자기 성찰적인 면모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두서 자화상>이나 여기서 소개하는 <이채 초상> 등과 같이 초상을 보는 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깁니다.

얼굴의 윤곽을 설정한 후 화가는 먼저 얼굴 뒷면에 배채(背彩)를 하였습니다. 배채는 화면의 뒷면에 채색하는 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배채를 하게 되면 앞에서 볼 때 비단올 사이로 배채한 채색이 투과되어 은은한 색상 효과를 살릴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맑고 투명한 얼굴빛을 재현할 수 있게 되어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선호되는 초상 기법으로 쉽게 정착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배채 후 앞에서 짧고 묘사적인 붓질을 수없이 그려서 이목구비의 굴곡과 특징을 살렸습니다. 필선을 무수하게 그어 음영을 만들고 밝은 곳은 붓질을 적게 하였습니다. 콧망울, 미간과 눈썹 주위는 밝게 하고 얼굴면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둡게 하여 얼굴이 볼록한 입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붓질이 얼굴의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몽롱한 느낌을 주는 <서직수 초상>과 달리 <이채 초상>에서는 눈 주위에서 보듯 필선의 개별성이 부분적으로 두드러져 <서직수 초상>보다 뒷 시기의 기법적 특징을 보입니다. 갓이 겹치는 면에 따라 검정색의 농도가 다르고, 눈가의 약한 검버섯, 콧등의 상처 자국 등을 묘사하는 등 세부적인 특징까지 놓치지 않았습니다.

매우 섬세한 안면 묘사에 비하여 옷주름은 선 위주로 대담하게 처리하여 평면적인 느낌을 줍니다. 심의 바탕에 하얀 배채를 하고 앞에서 옷주름 골에 그늘이 드리우도록 하였습니다. 가슴에 묶은 광다회의 짜임을 따라 흑, 백, 적, 청, 황의 색을 앞에서 칠하여 채색 효과가 도드라지고 초상에 생기를 줍니다. 전면을 또렷이 응시하며 입체감 있게 묘사된 얼굴과 달리 몸체는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표현하여 대조적입니다.

사진. <이채 초상(李采 肖像)>의 얼굴 <이채 초상(李采 肖像)>의 얼굴

사진. <서직수 초상(徐直修 肖像)> <서직수 초상(徐直修 肖像)>, 이명기(李命基)·김홍도(金弘道),
1796년, 비단에 색, 148.8 × 72.4 cm

이채를 말하다, 이채 자신과 친구들의 글

화면 오른쪽 위에는 이한진(李漢鎭, 1732~1815)이 전서로 쓴 이채 자신의 글인 자제문(自題文)이, 왼쪽 아래에는 뛰어난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72세인 1803년(순조 3)에 짓고 이를 유한지(兪漢芝, 1760~1834)가 예서로 쓴 찬문(讚文)이, 왼쪽 위에는 송원(松園)이 1807년(순조 7)에 행초(行草)로 쓴 원교노인(圓嶠老人)의 찬이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원교 노인은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아니고 원교라는 호를 쓴 다른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이한진이 쓴 이채의 글과 같은 내용으로「제진상(題眞像)」이라는 제목의 자제문(自題文)이 이채의『화천집(華泉集)』권9에 실려 있는데 세주(細註)에서 ‘임술(壬戌)’이라고 달아 자제문을 1802년(순조 2)에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채 초상도 이때에 그려졌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화면에는 1802년, 1803년, 1807년이라는 시기를 달리하여 묵서된 제발이 있게 되는데 1803, 1807년의 찬문은 초상의 제작 이후에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 이채의 자제문을 소개합니다.

정자관(程子冠)을 머리에 쓰고 주자(朱子)가 말씀하신 심의(深衣)를 입고
꼿꼿하면서 단정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짙은 눈썹에 하얀 수염, 귀는 높이 솟았고 눈빛은 빛난다.
그대가 참으로 계량(季亮) 이채(李采)라는 사람인가?
지난 행적을 살펴보니 세 고을과 다섯 주(州)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물으니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이다.
한 시대를 속이고 헛된 명성을 도둑질한 것은 아닐까?
아! 할아버지 이재(李縡, 1680~1746)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읽어라.
그러면 삶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정자(程子)와 주자의 문도(門徒)가 되기에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화천옹(華泉翁) 이채가 직접 글을 짓고,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이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이 쓰다.

彼冠程子冠, 衣文公深衣, 嶷然危坐者, 誰也歟. 眉蒼而鬚白, 耳高而眼朗. 子眞是李季亮者歟. 考其迹則三縣五州, 問其業則四子六經. 無乃欺當世而竊虛名者歟. 吁嗟乎. 歸爾祖之鄕, 讀爾祖之書. 則庶幾知其所樂, 而不愧爲程朱之徒也歟.
華泉翁自題, 京山望八翁書.

이채는 심의와 동파관을 쓰고 정면을 지그시 응시한 채 두 손을 단정히 맞잡은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이어 위와 같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글을 화면 위에 썼으며, 더 나아가 친교를 맺은 친구들의 평이 함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채의 모습을 표현한 초상과 함께 그의 인생을 증언하는 글들이 공존함으로써 결국 회화와 문장이 함께 어울려 이채의 총체적인 인생을 담게 되었습니다. 60세를 앞두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되묻고 앞으로의 삶을 방향 짓는, 이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초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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