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오리모양 토기 : 이상미

오리모양토기[鴨形土器]는 오리모양을 닮은 일종의 상형토기로써 넓은 의미에서 새모양토기[鳥形土器]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상형토기는 인물이나 특정한 물건을 본떠 만든 토기를 말하는데 외형은 실물을 모방하였지만 내부는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상형토기의 내부는 그릇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속이 비어있고, 외부에 뿔잔이나 주출구(注出口) 등이 붙어있어 잔이나 주전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형토기는 형태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의례를 위한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과 같이 사후세계에 대한 상징적 기원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장례와 같은 의례에서 술이나 물을 담아 따르는데 사용된 후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사진. 오리모양 토기

오리모양 토기, 울산 중산리 유적 ID-15호, 원삼국 3세기, 높이(우) 32.5 ㎝
오리와 닭이 조합된 듯한 신비한 새의 형상

오리모양토기는 원삼국시대인 3세기 후반부터 낙동강 유역에서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점차 도질토기(陶質土器)로 변화되며 5세기경까지 낙동강 동안지역에서 주로 발전하였습니다. 와질토기로 제작된 오리모양토기로는 울산 중산리, 경산 임당동, 경주 사라리, 울산 하대, 부산 복천동, 김해 대성동, 경주 덕천리 등의 출토품이 있습니다. 도질토기로 제작된 오리모양토기로는 신라문화의 영향권인 달성, 안동, 창녕 등 낙동강 동안지역에서 주로 출토되었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문화권 내에서는 오리모양뿐만 아니라 말, 소, 거북 등 여러 동물형상의 상형토기가 출토되어 오리와 같은 새모양토기에서 시작하여 점차 세밀하게 표현된 여러 종류의 상형토기가 다양하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울산 중산리유적 ID-15호 무덤에서는 와질토기로 제작된 오리모양토기 1쌍이 출토되었습니다. 넙적한 부리의 오리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머리 부분에는 실제 오리에 없는 닭의 볏과 같은 장식이 점토판으로 만들어져 부착되었고 눈도 과장되게 표현되었습니다. 몸통은 속이 비어있고 등 위에 원통형 주입구를, 꼬리 끝에는 주출구를 만들어 액체를 담고 따르는 주전자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다리부분은 오리의 실제 다리를 사실적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의례용 토기에 부착되는 굽다리가 부착되어있습니다. 한 점은 굽다리에 삼각형 투창이 뚫려 있으며, 다른 한 점은 투창이 없습니다. 이 한 쌍의 오리모양토기는 전체 기형을 성형한 후 토기의 표면을 정리하기 위하여 날카로운 작은 도구로 깎아내면서 마연하는 방법으로 정성스럽게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목과 꼬리 끝부분은 꼼꼼하게 마연하여 마치 새의 깃털처럼 보이게 하려는 듯 세밀하게 정리되어있습니다. 이 유물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오리의 모습이지만 오리와 닭이 조합된 듯한 신비한 새의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높은 굽다리 위에 놓여진 안정감 있는 새의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사진. 죽은 사람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과 같이 사후세계에 대한 상징적 기원을 표현한 오리모양토기

죽은 사람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과 같이 사후세계에 대한 상징적 기원을 표현한 오리모양토기. 경산 조영동 고분군 EⅠ-3호 무덤 출토, 원삼국 3세기, 높이 29.4 ㎝
죽은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새

오리와 같은 새모양토기는 고대에 특수한 용도로 제작된 여러 모양의 상형토기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새의 형상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 특정한 상징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인들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거나 봄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 준다는 조령신앙을 믿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동기시대부터 새를 형상화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농경문청동기에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 모습과 더불어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새의 그림은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등장하는 원삼국시대 소도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농경의례를 행하는 신성한 영역인 소도 안에 세워졌던 솟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는 예로부터 곡식을 물어다 주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오고 하늘의 신과 땅의 주술자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사진. 농경문 청동기 농경문 청동기

사진. 오리모양토기 오리모양토기, 가야 5~6세기, 영남지역 출토, 높이 16.5 ㎝

『삼국지위서동이전』 변진조(弁辰條)에는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 원삼국시대의 창원 다호리 유적 무덤 안에서는 새의 깃털을 꽂을 수 있도록 만든 칠기부채가 출토되었고, 최근 경주 탑동 및 여러 유적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부채가 출토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오리모양토기와 새를 형상화한 토기들이 무덤에서 출토한 예도 많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새의 깃털과 오리모양토기를 만들어 매납했던 변진한 사람들의 새와 관련된 장례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령신앙’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혼 전달자인 오리, 물을 건너 세계를 오갈 수 있는 동물

오리모양토기는 원삼국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특수용기로써 사람들 속에 퍼져 있던 새에 대한 신앙이 표현된 유물입니다. 특히 오리는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물을 건너 땅과 하늘의 세계를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신성한 동물로 여기며 영혼의 전달자로서 상징되었을 것입니다. 토기제작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오리모양토기도 점차 단단한 도질토기로 제작되기 시작하며 그 형태도 변화되었습니다. 도질토기로 제작된 오리모양토기는 원삼국시대에 비하여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아지고 볏의 표현이 간략화되어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눈이나 코의 표현도 점이나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날개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많습니다. 귀에는 귀걸이모양의 달개가 붙는 등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강해지는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시기에 따라서 제작방식과 세부 표현은 변화하고 있지만 오리모양토기가 갖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던 기능적인 측면은 시기가 달라져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오리모양 토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