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는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는 향로로써 부여 능산리 백제시대 절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향로는 크게 보면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막 피어날 듯한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인데 연꽃 봉오리의 중앙이 아래위로 분리되어 향로의 몸체와 뚜껑을 이루고 있습니다.
용 한마리가 연꽃 봉오리를 물다
용 한 마리가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백제금동대향로.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향로의 뚜껑은 중첩된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되어있고,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보주 위에 서 있습니다. 봉황 바로 아래 즉 뚜껑의 제일 위쪽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 완함, 동고, 종적, 소 등의 5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소발로 깎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묶여져 있으며 통견의 도포자락과 악기마다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이 사이에 표현된 5 봉우리에는 그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올려 보고 있습니다. 그 아래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신선을 상징하는 듯한 각종 인물, 동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묘사되어있는데 동물들은 실존 동물 이외에도 상상의 동물도 많이 등장합니다. 뚜껑의 문양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전면에 걸쳐 삼산형의 산봉우리 24개가 배치되어있는데 산봉우리 가장자리에는 집선문 문양대를 배치하여 산림이 가득한 산을 연출하였습니다. 이 산봉우리와 계곡 사이에는 각종의 진금기수가 드라마틱하게 고부조로 묘사되어있는데,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폭포 그리고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하여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도 보입니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호랑이,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의 실존 동물, 그리고 산중을 거닐거나 나무 밑에서 참선하는 인물, 기마수렵인, 낚시를 하는 듯한 형상의 인물상 등 도합 16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쪽 즉 뚜껑의 구연부에는 1단의 유려한 당초문 문양대를 배치하였는데, 몸체의 구연부에도 같은 형태의 당초문 문양대를 배치하여 뚜껑을 닫았을 때 두 문양대가 서로 맞닿도록 배치하였습니다.
향로의 몸체와 받침
반구형의 대접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판을 배치하였는데 각 연판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부분에는 밀집선문을 음각하였습니다. 연판은 동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 단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갈수록 그 폭이 줄어드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제일 하단의 연판에는 2줄의 음각선으로 복엽을 묘사하였습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 물고기, 신조(神鳥), 신수(神獸)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하였으며 제일 상단의 연판과 연판 사이의 몸체 여백면에도 연판의 부조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동물상을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요고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의 주악상, 동물을 타고 있는 듯한 1구의 인물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몸체에는 두 마리의 새를 중첩 표현한 연판 상단의 여백을 포함하여 도합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일 아래쪽의 받침에 해당하는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의 후미와 그곳에서 뻗어 나온 구름모양의 갈기를 투각 장식하여 받침으로 삼았습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 뒤까지 길게 뻗어있고, 길게 찢어진 입안으로는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하였습니다. 용의 입안으로 물려진 짧은 간주(竿柱)위로 몸체의 하부받침을 연결시켰는데, 간주는 몸체 안으로 솟아올라 그 바깥쪽으로 몸체와 연결되는 관을 끼워 몸체와 받침을 연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휘감은 몸체 사이사이에 물결무늬, 연꽃무늬 등을 배치하여, 용이 물결을 박차고 승천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X-선에 의해 밝혀진 향로의 과학적 설계
향로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상부장식과 뚜껑으로 된 상부, 몸통 및 받침이 연결된 하부의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부장식은 봉황이 보주 위에 서있는 듯한 형상인데 봉황의 다리 사이에 별도의 원형관이 보주와 봉황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X선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 원형관은 뚜껑의 상부에서 시작되어 보주를 관통하여 봉황 몸통까지 연결되며 이 끝, 즉 봉황의 가슴부위에는 작은 배연구 2개가 뚫려있습니다. 향을 피웠을 때 향연이 봉황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효과를 연출하면서 뚜껑과 상부장식의 결합도 단단히 하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배연구는 모두 12개가 뚫려 있습니다. 이중 2개는 이미 기술한 봉황의 좌우 가슴팍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 10개는 뚜껑의 산악문양 뒤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배연구는 이중의 정오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내외 구멍은 일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이 배연구는 모두 제작당시 마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배연구의 형태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지름 0.6cm의 작은 원형 배연구이고, 또 하나는 한 변 1cm 정도의 부정형 배연구인데 후자는 향로를 주조하고 난 뒤 끌 등을 이용하여 추가로 뚫은 것이고, 전자는 주조당시에 제작된 것입니다. 즉, 주조당시 이 향로에 뚫려있던 배연구는 모두 원형 배연구인데 사용해본 결과 향연이 원활하기 나오지 않자 부정형 배연구를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향로의 뚜껑 내면은 외면의 돌출부분에 대응하여 돌출시켰기 때문에 전체 향로의 두께는 0.5~0.6cm 정도로 균일한 편입니다. 하부는 반구형으로 생긴 몸체와 용트림하는 형상의 받침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부분의 연결도 관을 매개로 하여 접합하였습니다. 즉 용의 입에 물린 간주는 용과 함께 주조된 것으로 이것을 몸체와 연결된 관속에 끼워 몸체와 받침을 연결하였습니다.
그런데 X선 사진에 의하면 몸체와 연결된 간주 관도 몸체와 함께 주조된 것이 아니고 별주되어 접합한 것입니다. 즉 중앙에 상하로 된 관이 있고 하부에는 원반으로 연결된 중간 부속품을 사용하여 발과 받침의 접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도면참조). 받침은 용이 한 다리를 치켜들고 꼬리와 나머지 3다리를 이용하여 용트림하는 자세로 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파도문, 연화문, 소형의 구(球) 등을 배치하여 전체가 하나의 원형굽으로 연결되도록 하였지만, 받침 중 바닥에 닿는 것은 용의 발목 3지점만이 바닥에 닿으며 이들 3지점은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향로가 치밀한 과학적인 설계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 요소, 백제왕실의 사상을 압축하여 표현해
이 향로는 중국 한대 이후의 박산향로의 전통과 도상을 계승하면서도 오랜 시차를 두고 백제에서 출현하면서 시대적인 변화와 백제적인 요소가 더욱 가미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향로 자체도 전대에 비해 훨씬 대형화 되었지만 뚜껑에 표현된 신선의 세계는 전대에 비해 훨씬 크고 웅장하며 보다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가미되었고, 선인의 형상도 훨씬 인격화된 수행자 또는 도사의 존재로 표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면에 베풀어진 세부 도상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천상계인 정상에는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그 아래 뚜껑에는 지상의 동물 및 인물상(신선), 그 밑인 몸체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수중생물이나 물과 관련된 동물, 그리고 제일 아래쪽에는 음을 대표하는 수중동물인 용을 배치한 것으로 음양사상에 기본을 두고 배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이 향로의 전체형상이 용의 입에서 나온 기운으로 연꽃봉오리가 만들어지며 이 연꽃봉오리 속에서 모든 도상이 형성되는 것이 불교의 연화화생을 의미하며, 이것을 연화장 세계 또는 수미산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인 요소로 꾸며진 문양이 시문된 것은 무령왕릉 은제 탁잔, 부여 외리 출토 문양 전에도 보여, 백제적인 문양표현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아울러 이 향로가 출토된 절터가 불교의 일반적인 수행사찰이 아니고,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의 원찰인 만큼 이 향로의 용도도 전형적인 불교의식 법구가 아니고, 백제왕실에서 선왕을 제사 지낼 때 사용하기 것이기 때문에 이 향로에는 당시 백제왕실의 사상관을 압축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