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왕실의 추모 의식을 기록한 의궤 : 유새롬

선왕에 대한 추모의식은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높이는 동시에, 현재 왕의 정통성과 위상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삼년상이 끝난 후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일생에 대한 평가를 담은 시호를 올리고 이후 추존의 호칭을 거듭 올린다든가, 선왕의 어진을 제작하여 봉안하는 일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외규장각 의궤에도 이러한 의식을 기록한 의궤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진.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太祖神懿王后太宗元敬王后諡號都監儀軌)』. 태조와 태종에게 시호를 더해 올리고 태조 비 신의왕후와 태종 비 원경왕후의 위판(位版)을 고쳐 쓴 과정에 대한 의궤입니다. 새 시호를 새긴 금보(金寶)를 만들었는데, 이 때 태조의 시호는 이정영(李正英)이, 태종의 시호는 김만기(金萬基)가 전서(篆書)로 썼습니다.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太祖神懿王后太宗元敬王后諡號都監儀軌)』,
1683(숙종 9), 1책, 44.6 × 34.2 ㎝
태조와 태종에게 시호를 더해 올리고 태조 비 신의왕후와 태종 비 원경왕후의 위판(位版)을 고쳐 쓴 과정에 대한 의궤입니다. 새 시호를 새긴 금보(金寶)를 만들었는데, 이 때 태조의 시호는 이정영(李正英)이, 태종의 시호는 김만기(金萬基)가 전서(篆書)로 썼습니다.
일생을 담은 이름, 시호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에게는 그 일생을 함축한 이름, 시호(諡號)를 올렸습니다. 시호가 결정되면 이를 옥에 새긴 뒤 탁본하여 책으로 만들고 도장으로 새겼습니다. 여러 편의 옥에 시호를 새겨 책으로 만든 것은 시책(諡冊)이라 하고, 시호를 도장에 새긴 것은 시보(諡寶)라고 합니다. 왕의 재가를 받은 시호를 시책과 시보로 만들어 종묘에 고하고 허락을 요청하는 의례를 거친 후 빈전에 함께 모셨습니다. 시호는 왕의 승하 후 바로 올리는 것 외에 후대 왕이 추가로 올리기도 하였으며, 왕의 사친(私親)에게도 후대에 추숭하는 의미로 시호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사후에 받는 이름은 시호 외에도 묘호(廟號), 전호(殿號), 능호(陵號)가 있었습니다. 묘호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고, 전호는 국장 이후 3년 동안 신주를 모시는 혼전의 이름, 능호는 왕릉의 이름입니다. 이 중 묘호는 왕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반영된 이름으로, ‘태조’, ‘세종’과 같이 왕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진. 경혜인빈상시봉원도감의궤(敬惠仁嬪上諡封園都監儀軌). 원종(元宗, 인조의 부친)의 생모인 인빈(仁嬪, 1555~1613)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올리고 그 묘소를 순강원(順康園)으로 봉하고 사당[廟宇]과 묘소를 정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그 중 묘우조성소의궤에는 신주를 모시는 장인 신장(神欌)을 비롯해 신탑(神榻), 신의(神倚)의 제작방법, 재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혜인빈상시봉원도감의궤(敬惠仁嬪上諡封園都監儀軌), 1755(영조 31), 2책, 48.5 × 34.0 ㎝, 유일본(상)
원종(元宗, 인조의 부친)의 생모인 인빈(仁嬪, 1555~1613)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올리고 그 묘소를 순강원(順康園)으로 봉하고 사당[廟宇]과 묘소를 정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그 중 묘우조성소의궤에는 신주를 모시는 장인 신장(神欌)을 비롯해 신탑(神榻), 신의(神倚)의 제작방법, 재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당에 모신 조상, 부묘와 부궁

국장(國葬)은 왕릉에서 장례를 마친 후 삼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혼전(魂殿)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장은 삼년상 후 혼전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시는 부묘(祔廟)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부묘는 별도로 부묘도감을 설치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왕과 왕의 사후에 사망한 왕비의 경우는 삼년상이 끝나는 대로 부묘되었으나, 왕의 생전에 사망한 왕비는 혼전에 계속 신주를 모시다가 왕의 삼년상이 끝난 후 함께 부묘되었습니다. 부묘를 위해 새로운 신주와 함께 시책(諡冊), 시보(諡寶)를 만들어 종묘의 감실에 함께 모셨습니다.

사진. 『명성왕후부묘도감의궤(明聖王后祔廟都監儀軌)』. 현종 비 명성왕후(明星王后, 1642~1683)의 삼년상이 끝난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 대한 의궤입니다. 부묘 행렬의 주요 구성을 살펴보면, 전반부에는 백택기(白澤旗)를 비롯한 의장물이, 중반부에는 생전에 받았던 각종 교명(敎命)과 책보(冊寶), 시보(諡寶)와 시책(諡冊)을 실은 가마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신주를 모시는 신여(神轝)와 신연(神輦)이 배치되었습니다.

『명성왕후부묘도감의궤(明聖王后祔廟都監儀軌)』, 1686(숙종 12), 1책, 50.3 × 38.1 ㎝
현종 비 명성왕후(明星王后, 1642~1683)의 삼년상이 끝난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 대한 의궤입니다. 부묘 행렬의 주요 구성을 살펴보면, 전반부에는 백택기(白澤旗)를 비롯한 의장물이, 중반부에는 생전에 받았던 각종 교명(敎命)과 책보(冊寶), 시보(諡寶)와 시책(諡冊)을 실은 가마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신주를 모시는 신여(神轝)와 신연(神輦)이 배치되었습니다.

세자나 세자빈, 혹은 그 외 왕의 사친(私親)은 신주를 종묘에 모실 수 없기 때문에 별도의 사당을 만들어 그곳에 신주를 모셨는데, 이를 부궁(祔宮), 혹은 입묘(入廟)라고 하였습니다. 의례절차는 부묘와 유사하나 보다 간소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인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敬慕宮)에,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는 경우궁(景祐宮)에, 효명세자는 문호궁(文祜宮)에 각각 신주를 모셨습니다.

사진.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1770~1822)의 신주를 모실 별묘(別廟)인 경우궁(景祐宮)을 짓고 신주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현사궁(顯思宮)은 상기(喪期) 동안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혼궁(魂宮)이었습니다. 책머리에 정당(正堂)을 비롯한 경우궁 전체의 배치도와 신주를 모시는 감실(龕室), 혼령이 앉는 신탑(神榻)의 채색 도설과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좌)경우궁 배치도, (우)감실과 신탑의 도설.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1824(순조 24), 1책, 45.8 × 32.1 ㎝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1770~1822)의 신주를 모실 별묘(別廟)인 경우궁(景祐宮)을 짓고 신주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현사궁(顯思宮)은 상기(喪期) 동안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혼궁(魂宮)이었습니다. 책머리에 정당(正堂)을 비롯한 경우궁 전체의 배치도와 신주를 모시는 감실(龕室), 혼령이 앉는 신탑(神榻)의 채색 도설과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좌)경우궁 배치도, (우)감실과 신탑의 도설.
선왕에 대한 기억, 어진의 제작

조선시대 왕의 영정(影幀)은 종묘의 신주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진전(眞殿)을 별도로 설치하여 역대 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왕의 영정은 특별히 어진(御眞), 어용(御容)이라고도 합니다. 특히 창업주인 태조의 어진은 수도 한양을 비롯하여 지방의 여러 곳에 진전을 설치하여 모셨습니다. 역대 왕과 왕비의 영정은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였습니다.

조선전기의 영정과 진전 제도는 양란을 거치며 크게 훼손되었다가 숙종 대 새롭게 정비되었습니다. 숙종은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중건한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하고, 세조를 비롯한 역대 왕의 어진도 모사하여 다시 제작하였습니다. 남별전은 영희전(永禧殿)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숙종은 자신의 어용을 제작하여 강화부 장녕전에 봉안하였는데, 이 때부터 현 왕의 어용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이후 영, 정조대에 이르러 10년마다 어용을 제작하는 것이 정착되었습니다. 조선의 왕들은 이러한 어진의 제작과 봉안을 통해 국조(國祖)와 선왕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진.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 숙종(肅宗, 1661~1720)의 초상화를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완성 어진의 정본(正本) 1건은 강화부의 장녕전(長寧殿)에, 소본(小本) 1건은 선원각(璿源閣)에 보관했습니다. 5월 22일 숙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주관화사(主管畫士) 진재해(秦再奚)는 품계를 올려주고, 동참화사(同參畫士)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장득만(張得萬)과 수종화사(隨從畫士) 진재기(秦再起), 허숙(許俶)에게는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 1713(숙종 39), 1책, 46.0 × 26.7 ㎝
숙종(肅宗, 1661~1720)의 초상화를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완성 어진의 정본(正本) 1건은 강화부의 장녕전(長寧殿)에, 소본(小本) 1건은 선원각(璿源閣)에 보관했습니다. 5월 22일 숙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주관화사(主管畫士) 진재해(秦再奚)는 품계를 올려주고, 동참화사(同參畫士)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장득만(張得萬)과 수종화사(隨從畫士) 진재기(秦再起), 허숙(許俶)에게는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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