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임한경명첩, 김정희 : 안경숙

추사 김정희, 한나라 때의 거울, 그리고 고고학

《임한경명첩(臨漢鏡銘帖)》은 언뜻 보기에는 너무나 멀어 보이는 위의 조합들의 연결고리가 되는 유물입니다. 이 책의 후기에 밝히고 있듯이 추사가 서체에 임했던 정신뿐만 아니라 이 유물을 통해서 그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 당시 부유한 학자층을 중심으로 풍미되었던 박물학, 고기물학의 성장 배경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근대 학문인 고고학에 기여한 추사의 학문적 영향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사진. 《임한경명첩》

《임한경명첩》, 김정희,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33.8 x 26.7 cm
추사, 고증학을 배우다

해동제일의 글씨라는 추사체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 산문에 이르기까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예술적 재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추사는 어린 시절 증조부의 서재에서 장서를 읽으며 일찌감치 학문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당시 북학파의 대가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받게 되고, 추사의 나이 24세에는 연행(燕行)을 통해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 등 청국의 당대 석학과 학연을 맺은 후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하게 됩니다.

청나라 때 발달한 고증학의 중요한 연구 분야 중에 고대 기물에 대한 연구가 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송대(宋代)에 편찬된 구양수의 『집고록』·『박고도』등으로도 그 계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중 『박고도』는 휘종(재위 1100∼1125)의 고기물을 수장했던 선화전의 이름을 붙여서 『선화박고도록』이라고도 합니다. 선화전 후원에 수장했던 고동기(古銅器) 중 839점을 선별하여 종류별로 도시(圖示)하고 그에 대한 명문 등을 기록하고 해석해 놓은 도록입니다. 이 후 이러한 청동기 도록은 청대의 『서청고감』 등으로 이어지며 크게 유행하게 되고, 시대와 문양분류, 명칭 등에 있어서도 후학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해 박물학, 고기물학 연구자들에겐 필독서가 되어왔습니다.

해동제일의 글씨, 추사체의 완성과 한대 동경

김정희에게 있어 예서(隸書)는 가장 중심적인 서체인데, 이는 추사의 예서풍이 다른 서체에도 두루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김정희는 어떻게 예서를 학습했을까요? 젊어서는 주로 세련된 동한대의 예서를 배우다가 뒤로 가면서 점차 고졸하고 정제되지 않은 고예를 추구했다고 합니다. 특히 서한 고예를 근간으로 하고 동한 예서 가운데 동경이나 마애 명문을 애호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현존하는 한예 임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금문(金文) 가운데 한대 경명이 가장 많은 것은 김정희가 서한 경명은 물론 동한 경명이라도 고졸한 서풍을 애호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관련 학계의 의견입니다.

김정희는 예서 중에서도 한대 금석문을 애호했고 특히 경명(鏡銘)을 즐겨 임서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임한경명첩》은 주목할 만한 유물입니다. 이 서첩은 추사 김정희가 중국 한나라 때의 거울에 새겨진 글씨[鏡銘]를 임서한 것입니다. 이 서첩에는 ‘완당의고예첩’ 이라고 써 있고, 뒤에는 추사가 서체에 임했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 후기가 행서로 쓰여 있어 눈길을 끕니다.

사진. 《임한경명첩》의 후기 부분. 추사가 거울의 명문을 임서한 이유를 기록

《임한경명첩》의 후기 부분. 추사가 거울의 명문을 임서한 이유를 기록해놓았습니다.

한대(漢代)의 예서로 지금 남아 있은 것은 모두 동한시대의 고비(古碑)이고 서한시대의 비석은 한 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미 송(宋)의 구양수가 살아있었을 때도 그렇다. 축군명(鄐君銘)은 동한시대의 가장 오래된 비(碑)이지만 여전히 서한시대와 비교한다면 크게 변모한 것이 아니다. 대략 정(鼎), 감(鑑), 로(爐), 등(鐙)에 남아 있는 몇 글자를 가지고 서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겨우 몇 종류뿐이다. 지금 서한시대가 가지고 있는 서체의 의미를 모방하여 써서 사언(史言)의 요구에 응한다. 예당禮堂.

김정희는 오래된 금석문에서 한나라 예서의 정수를 찾으려 했지만, 당시 서한의 비갈을 찾기 힘들었기에 거울 명문이나 한대 금석문에 집중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예는 추사가 남긴 여러 작품에서 확인됩니다. 추사가 남긴 서첩 중 하나인 《한예필첩》에 실린 경명을 임서한 예들도 역시나 청대에 발간된 청동기 도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개인 소장본으로 전하는 몇 편의 한예 임서 목록에 기년경(紀年鏡) 등 여러 점의 동경 명문이 전해지고 있음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고증학적 방법과 고기물 도록을 참고 하면서 나름의 서체를 갈고 닦았던 추사의 학문적 접근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사진. 한경 명문 부분 한경 명문 부분

사진. 『서청고감』중 한경이 실린 부분. 『서청고감』중 한경이 실린 부분. 한경이 도면화 되어 도상과 명문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추사가 한국 고고학에 기여한 측면

김정희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고 문헌기록과 유적·유물을 견주어 평가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일입니다. 또한 북청 유배 시절, 청해토성 출토 석창과 석부를 고고학적으로 파헤쳤음은 물론 평양지방에서 출토한 ‘천추만세(千秋萬世)’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보고 그 글자체가 한대의 것임을 입증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경주평야에 있는 신라무덤을 조산(造山)이 아닌 왕릉으로 해석하는 등 고고학의 방법에 접근된 연구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의 사건을 더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서체란 열 개의 벼루 바닥을 드러내고 팔뚝 밑으로 309개의 비가 들어 있어야지 하루아침 사이에 아주 쉽게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라던 그의 고백과 같이 추사체는 편집증처럼 무섭게 파고들어 이루어낸 노력의 결실이며, 서체의 탐구라는 그만의 방법론을 통해 한대동경을 서한과 동한으로 편년·분류해내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편년과 분류의 근거자료로 참고했을 『박고도(博古圖)』와 『서청고감(西淸古鑑)』 등 여러 문헌들은 향후 한대 청동기물 편년과 분류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경 문양 및 시대 분류의 기준서가 되었다는 면에서 국내에서 한대 고고학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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