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동래부사접왜사도 : 장진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는 동래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를 그린 그림입니다. 병풍에 넓게 펼쳐진 화면은 산수와 인물, 건물이 어우러진 파노라마 식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른쪽부터 크게 세 장면으로 나누어 봅시다. 첫째 폭부터 일곱 폭에 걸쳐 동래부(東萊府)와 부산진(釜山鎭)을 지나 행사가 열리는 초량 왜관으로 들어서는 행렬이 산수 경관을 배경으로 길게 이어집니다. 여덟째 폭은 초량객사에서 일본 사신이 조선 임금의 전패(殿牌)에 예를 올리는 숙배(肅拜) 장면입니다. 마지막 폭에서는 왜관의 연향대청(宴饗大廳)에서 일본 사신을 위해 베푼 잔치가 한창입니다.

사진. <동래부사접왜사도> 우반부와 좌반부

<동래부사접왜사도> 조선후기, 종이에 색, 81.5 × 460 cm, 상단 : 우반부, 하단 : 좌반부
동래부사, 일본사신을 맞이하다

행사가 열리는 주 공간은 초량 왜관입니다. 왜관은 조선시대 일본인의 조선 왕래를 허가하면서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하였습니다. 잦은 왜란과 함께 철폐와 재설치가 반복되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1607년(선조40)에 부산진 두모포에 설치되었고, 이후 1678년(숙종 4)에 초량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곳에는 조선인 관리가 있었으며, 500~6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근무하였고 연간 50척의 무역선이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왜관의 총수는 관수(館守)라 불렀고, 지금의 총영사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초량 왜관은 조선후기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림에서 행차는 맨 오른쪽 폭의 동래부 읍성에서 출발하여 그 다음 폭에서는 부산진을 지나갑니다. 이 두 곳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과 부산진 첨사(僉使) 정발(鄭撥, 1553~1592)이 순절한 역사적인 장소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일본사신 접대 행사를 주관하는 두 인물과 관련된 곳으로도 의미 있는데, 이들은 동래부사와 부산 첨사로 그림에서는 오른쪽에서 네 번째 폭에 등장합니다. 가마를 타고 가는 이가 동래부사고, 그 뒤에 말을 탄 인물이 부산 첨사입니다.

사진. <동래부사접왜사도> 세부. 가마를 타고 가는 이가 동래부사고 그 뒤에 말을 탄 인물이 부산 첨사

<동래부사접왜사도> 세부, 가마를 타고 가는 이가 동래부사고 그 뒤에 말을 탄 인물이 부산 첨사입니다.
대일본 외교의 유일한 창구이자 변방을 지켰던 동래

동래부사는 지방 행정 조직인 동래부의 수령으로 왜관을 관할하였습니다. 부산 첨사는 왜관에서 가장 가까운 진인 부산진을 책임졌던 종3품 무관입니다. 효종 2년 10월 11일 『승정원일기』에 보면, “동래의 고을됨은 오직 일본과 접해 있음에 있다(東萊爲邑 專屬接倭)”고 했을 만큼 동래는 조선후기 대일본 외교의 유일한 창구이자 변방을 지키는 방어기지로서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외교 사절에는 주로 대마도주가 파견하는 연례적인 사신인 송사(送使)와 외교 현안이 있을 때에만 파견되는 차왜(差倭)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은 상경(上京)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 사신의 접대와 외교 업무는 이 곳 동래부에 있던 왜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사신의 성격에 따라 접대를 위한 관리 ‘접위관(接慰官)’을 서울에서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사안이 덜 중요하거나 연례적인 사신의 접대는 향관(享官)이 담당하였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가 봅시다. 설문(設門)을 지나 초량 왜관에 들어간 동래부사와 부산 첨사는 정식 관복 차림으로 객사에서 일본사신의 숙배례를 주관합니다. 대청에 전패가 모셔져 있고 일본 사신 일행은 뜰에서 대청을 향해 예를 올리고 있습니다. 접위관 일행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래부사접왜사도>는 연례 송사의 접대 장면을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 폭의 향연 장면에 다시 등장합니다. <동래부사접왜사도>는 일본 사신 접대 행사를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에 맞추어 열 폭의 병풍에 재구성한 그림인 것입니다.

사진. <동래부사접왜사도> 세부. 왜사숙배식(倭使肅拜式). 일본 사신이 조선 임금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숙배 장면 <동래부사접왜사도> 세부, 왜사숙배식(倭使肅拜式). 일본 사신이 조선 임금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숙배 장면입니다.

사진. <동래부사접왜사도> 세부, 연향(宴饗). 일본 사신을 위해 베푼 잔치의 모습 <동래부사접왜사도> 세부, 연향(宴饗). 일본 사신을 위해 베푼 잔치의 모습입니다.

흥미로운 지방 관아의 이벤트를 포착한 풍속화

동래부에서 일본 사신의 방문, 특히 정기적으로 치러졌던 연례 송사는 고을의 위상을 규정짓는 특별하고도 일상화된 이벤트였을 것입니다. 행사의 주요 등장인물이 ‘외국인’이라는 점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외국인의 모습이나 이국의 풍물습속을 소재로 하는 그림은 중국의 오래된 회화 관련 서적에도 보이는 풍속화의 고전적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송 선화 연간에 고려에 다녀간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외국에 대한 정보수집의 차원에서 고려의 문물을 시각화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지었습니다. 중국에 온 사신들의 모습을 그린 <직공도(職貢圖)>는 주변 이민족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제작한 정치적 의도의 풍속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소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국적인 것, 미지의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이 기저에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진. <왜관도>

<왜관도>, 변박(卞璞), 조선 1783년,
종이에 엷은 색, 132×58cm

<동래부사접왜사도>는 이처럼 특별하면서도 흥미로운 지방 관아의 사건을 포착한 풍속화입니다.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예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감사향연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림에서 우리는 이국의 것 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를 기대하는 세속적인 호기심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특정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났던 (또한 현재도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일상화해서 재현하기 때문에 ‘실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화가는 ‘실제’ 동래부에서 행해진 사신 접대 이벤트를 현실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고심했을 것입니다. <동래부사접왜사도>에서는 이벤트가 벌어지는 공간을 지도처럼 나타내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화면 맨 오른쪽의 동래부 읍성과 부산진성은 동래 지역을 그린 고지도처럼 상세합니다. 화면 왼편 둘째 폭에는 그림에서와 같이 실제로도 설문과 연향대청 사이에 위치한 조선 관리들의 빈청 성신당(誠信堂)과 빈일헌(賓日軒)이 자리합니다.

1783년에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왜관도>를 통해 왜관의 설문에서 초량객사를 지나 성신당과 빈일헌을 거쳐 언덕 뒤에 자리 잡은 연향대청의 실제 위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동래부사접왜사도>의 화가는 변박의 그림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객사와 연향대청 사이의 공간(이벤트에서는 별로 중요치 않은)을 대폭 축소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신당과 빈일헌은 아주 작게 등장하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이 현실적 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기에 중요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건물과 주요 지형에 이름을 표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현실성에 대한 고민은 풍속화가에게 있어 긴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래부사접왜사도>의 화가는 동래부의 연례 행사인 ‘고을 원님의 일본 사신 접대 행차’를 하나의 드라마처럼 엮었습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이끄는 떠들썩한 행차, 일본 사신의 낯선 차림새, 화려한 향연 등의 볼거리들이 지도처럼 딱 들어맞는 고을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기대하는 일상의 한 장면입니다. 일상은 현실이기에 그림은 현실보다 더 현실다워야 눈길을 끕니다. 거기에 풍속화의 묘미가 있고, 그것이 풍속화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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