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간석기는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지지만 가장 발달했던 시대는 청동기시대입니다. 간석기 가운데 양날과 손잡이를 지닌 간돌검은 청동기시대에 등장하여 철제 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한반도를 대표하는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간돌검이 단순히 무기로써의 기능만 했을까요? 간돌검은 청동기시대 동북아시아 중 한반도에서 가장 발달했기에 기능적 측면을 넘어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큰 간돌검
2002~2003년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청도에서 93기의 집터를 비롯한 대규모의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집터가 모여 있는 주거 영역 주변에서는 5기의 고인돌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 3호 고인돌은 1, 2호와는 달리 덮개돌이 유실된 상태였는데, 조사를 진행하자 1점의 간돌검과 10점의 돌화살촉이 매장 시설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호 고인돌에서 출토된 청도 진라리 유적 간돌검의 길이는 66.7cm로, 청동기시대 간돌검의 길이가 평균적으로 30cm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크고 그만큼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청도 진라리 유적 간돌검은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보고된 간돌검 가운데 가장 큽니다.
길이 66.7cm, 국립경주박물관, 경주19611
간돌검의 형태는 시간성 반영
간돌검은 손잡이의 형태에 따라 크게 이단병식, 일단병식, 유경식(나무자루를 끼우는 방식)으로 나누어지며 이는 시간성을 반영한다고 여겨집니다. 등장시점이 이단병식(전기 유행)→ 일단병식→ 유경식(후기 유행)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라리 유적의 간돌검은 외형적으로 손잡이 가운데 부분이 들어간 이단병식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단이 져 있지 않고 상하에 튀어나온 돌대 즉 절(節)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절병식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검들은 주로 영남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크기가 대형화되고 손잡이 머리 부분이 과장되어 있는 등 실제 사용된 무기라기보다 무덤에 껴묻기 위해 만든 의기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화살촉이나 붉은간토기 등 함께 출토된 유물로 보아 청동기시대 후기에 주로 만들어진 영남지역에서 유행한 껴묻거리용 검으로 생각됩니다.
간돌검을 찬 피장자?
진라리 간돌검은 사람이 눕혀진 매장시설의 바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인골이 발견된 달성 평촌리 유적의 사례를 보면 간돌검은 피장자의 허리 부근에서부터 날이 아래쪽을 향하게 놓여 있습니다. 마치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던 듯 말입니다. 양호한 상태의 전신 인골이 발견된 달성 평촌리 20호 무덤은 고인돌이 아니라 돌널무덤이지만 출토된 간돌검의 형태나 크기, 돌화살촉의 형태가 진라리의 것과 유사합니다. 평촌리 검이 진라리 검보다는 시기적으로 늦다는 최근 연구 성과가 있지만 둘 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검입니다. 평촌리 예를 통해 진라리 유적의 검 역시 피장자의 허리 부근부터 날이 아래쪽을 향하게 놓여 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진라리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머리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검은 사람의 왼쪽에, 화살촉은 다리 쪽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간돌검의 상징성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부장품의 종류로는 청동기, 석기, 옥기, 토기가 있습니다. 석기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간돌검과 돌화살촉입니다. 대개 피장자의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 피장자 생전의 권위를 나타내주는 위세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기인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점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직까지 전쟁과 관련된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청동기시대 사회가 이전 시대에 비해 갈등이 심화된 사회였음은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농경사회에 들어선 시대입니다. 농경사회에 들어섰다는 것은 씨앗을 뿌리고 곡물을 거두기 위해 한 곳에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정착생활을 하였고 집단의 결속과 성장, 수확물의 분배와 갈등, 마을을 아우르는 지배자의 출현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집단 내 혹은 집단 간 분쟁을 조정하고 통합을 이끌어나간 지배자의 위상이 간돌검과 돌화살촉에도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청동기시대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지니는 상징성은 고인돌의 덮개돌 또는 묘역을 나타내주는 구획석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여수 오림동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일단병식 석검이 사람보다 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으며 마치 검 앞에서 무엇인가를 빌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부러진 채 발견된 간돌검, 의도한 것일까.
간돌검에서 날과 손잡이의 경계에 해당하는 부분을 심부(鐔部)라고 부릅니다. 진라리 3호 간돌검은 이 심부가 옆으로 길쭉하게 돌출되어 있는 형태인데 한쪽이 부러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용하다 부러진 것을 그대로 무덤 속에 넣은 것일까요? 진라리 3호 검과 비슷하게 대형화된 간돌검 중에는 심부 한쪽이 부러진 것이 종종 발견되고 있어 의도적인 파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청동기시대 매장의례 가운데는 의도적으로 부러뜨려 부장하는 파쇄행위란 것이 있습니다. 간돌검과 같이 중요한 가치재로 여기는 것을 의도적으로 부러뜨려 무덤 내 다른 곳에 두는 것입니다. 초기철기시대에는 동경을 여러 조각으로 부러뜨려 무덤 이곳저곳에 둔 모습이 확인됩니다. 귀중한 물건을 왜 부러뜨려 넣었는지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자(死者)의 집단 내 신분이나 역할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19세기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행위가 가치 증식 및 사자(死者)에 대한 순수한 증여를 의미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주목됩니다.
왜 청동이 아니라 돌인가
그렇다면 왜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상징이 청동검이 아니라 간돌검일까요? 물론 청동기시대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 청동검이 있었습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동검이 바로 요령식 동검입니다.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의 출토품들을 보면 이 시기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의 세트(동검, 간돌검, 돌화살촉, 옥)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한지역에서 청동기가 발달했던 시대는 청동기시대에 이은 초기철기시대입니다. 청동기시대이긴 하지만 청동기는 극히 일부만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간돌검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요령식 동검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좀 더 까다로운 공정이 필요한 청동이라는 재료 대신 돌을 사용하여 지배자의 위세품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돌을 사용했다고 해서 만들기 쉬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특히 진라리 3호 출토품처럼 대형의 검이나 돌의 결을 대칭적으로 살린 것들은 전문적인 장인이 아니고서는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라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