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회암사에서 출토된 ‘효령대군(孝寧大君) 선덕갑인오월(宣德甲寅五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 유교 국가 조선 왕실의 불교 우호 정책 : 이수경

<‘효령대군 선덕갑인오월’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효령대군 선덕갑인오월’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 조선 1434년, 지름 17.4cm, 신수28681

서울의 동북쪽인 경기도 양주에 한 때는 삼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규모가 컸던 회암사(檜巖寺) 터가 있는데, 중심 전각인 보광전(普光殿) 터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 선덕갑인오월(宣德甲寅五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여러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수막새 가운데 범어인 ‘옴’자가 있고 글자 좌우에 ‘효령대군’이, 하단에 ‘선덕갑인오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를 설명하면, ‘효령대군(1396∼1486)’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둘째 형으로 불교를 옹호한 대표적인 왕실 인물이고, ‘선덕’은 중국 명나라 선종(宣宗, 재위 1426~1435)의 연호로, 선덕연간 중 갑인년은 1434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수막새는 1434년 5월에 제작되어 보광전 기와로 사용되었으며, 효령대군은 수막새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보광전 불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왕자 이름이 왜 사찰 수막새에 등장했을까?

조선시대의 특징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공식처럼 외워왔는데,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인 대군이 무슨 연유에서 사찰 수막새 제작에 관여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조선의 불교 업악 정책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사찰 및 승려가 누렸던 혜택은 모두 철폐되었고, 사찰은 정리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종단을 폐합하여 선(禪) · 교(敎) 양종(兩宗)으로 하고 한양 성 밖 승려의 성 안 출입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 시책과는 달리 왕실, 사대부와 일반 백성에게 오랫동안 신앙의 중심이었던 불교와 그 관행을 한순간에 뿌리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원찰(願刹)을 두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고 세종조차도 대장경을 재간행하였고,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많은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등 친불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때는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후원으로 왕실 불교가 성행하는 등 정책상 모순되는 지점이 생겨났습니다.

회암사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청동 금탁

특히 고려 말 나옹(懶翁, 1320~1376)이 중건한 회암사는 조선 전기까지 왕실의 후원 속에서 융성한 사찰이었습니다. 태조는 스승 무학(無學, 1327~1405)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교 행사 때마다 신하를 보내 참례하였고,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머물렀습니다. 회암사는 태종과 태종비 원경왕후의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 역할을 했습니다.

회암사는 규모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특징에서 왕실 원찰로서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요 불전인 보광전은 발굴 결과 전면 5칸, 측면 4칸의 웅장한 건물이었고 다른 불전에서는 보기 힘든 월대(月臺)가 있었는데 이로써 보광전이 궁궐건물의 정전(正殿) 같은 성격의 건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금탁>, 조선 1394년, 청동, 높이 31.7cm, 지름 30.7cm, 신수28712 <금탁>, 조선 1394년, 청동, 높이 31.7cm, 지름 30.7cm,
신수28712

금탁 측면의 명문 금탁 측면의 명문
왕사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
王師妙嚴尊者 朝鮮國王 王顯妃 世子

보광전 북동 모서리와 북서 모서리 외곽 1m 지점에서 지붕 처마 밑에 다는 풍탁(風鐸)이 출토되었습니다. 매우 크기가 큰 풍탁으로 보광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탁 표면에는 ‘왕사(王師) 묘엄존자(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 ‘홍무洪武 27년(태조 3)’이라는 문구와 함께 테두리에는 13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태조와 회암사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왕사 묘엄존자는 무학이고, 조선국왕은 태조이며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1396), 세자는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에서 희생된 방석(芳碩, 1392~1398)입니다. 태조는 유교 국가의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승려를 왕의 스승인 왕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금탁 테두리의 명문

금탁 테두리의 명문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전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보다 훌륭하다. 금탁을 달아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바란다. 또한 작은 티끌같은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緣起)를 받들어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전쟁[干戈]이 영원히 그쳐서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마침내 같은 인연의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홍무 27년(1394) 갑술 6월
天寶山中檜岩寺 寶光明殿四校角 金粧碧彩勝天宮 願縣金鐸供諸佛 亦使微廘諸衆生 聞聲皆悟本心佛 願我衆此妙良綠 朝鮮之号傳萬歲 干戈永息國民安 畢竟同綠歸覺際 洪武二十七年甲戌六

금탁 테두리의 명문

금탁 테두리의 명문
공덕주 가정대부판내시부사 이득분 시주 정신택주 허묘정 함양군부인 박묘담 영순택주 박씨 협성옹주 윤씨 검교문하시중 이숭
公德主 嘉靖大夫判內侍府事李得芬 施主 貞信宅主許妙淨 咸陽郡夫人朴妙湛 寧順宅主朴氏 鉿□ 城翁主尹氏 檢校門下侍中 李崇
□ : 해독이 불가능한 글씨

풍탁 테두리 부분에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보다 훌륭하다. 금탁(琴鐸)을 달아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바랍니다.”는 글에서 풍탁이 있었던 위치와 함께 풍탁을 금탁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이 만세토록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이득분(李得芬)’은 내시부 최고 관직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까지 오른 인물로 태조의 불사 후원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이숭(李崇)’은 조선 초 관리로 1393년 태조와 신덕왕후 및 세자, 이득분과 함께 해인사 대장경 인경(印經)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또한 고위 관료의 부인과 왕실 인물 등이 등장하여 조선시대 불교 신앙이 왕실과 사대부 내에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암사 수막새는 순조롭게 제작되었을까?

조선 초 억불정책으로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던 상황과는 달리,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1424년(세종 6)에는 여느 절의 세 배가 넘는 전답과 250여 명의 승려가 머무는 당시 최고의 사찰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회암사로 더욱 많은 재화와 인파가 모여들게 되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높아져 갔습니다.

회암사 출토 수막새가 제작되기 한 달 전인 1434년(세종 16) 4월 실록 기록에서 효령대군의 이름이 수막새에 새겨진 연유와 보광전 중창을 둘러싼 왕실과 신하의 대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광전에는 세종의 모친인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수놓았던 불화가 모셔져 있었는데, 보광전에 물이 새어 보수가 필요하자 회암사에서는 모금 활동을 펼쳤습니다. 왕실 사찰이라는 지명도로 인해 보수비 모금이 성황리에 이루어지자 신진사대부들 사이에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결국 4월 11일 성균관 유생이 보광전 보수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16일까지 이에 관한 논의가 4차례나 진행되었습니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강경했던 세종의 입장과 태도는 점차 회암사 보수를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는 방향으로 변해갔습니다.

첫날 세종은 “회암사 불전을 수리할 뿐인데, 너희가 말하는 종친에 의탁하였다는 일은 내가 아는 바가 없다.”라고 말하며 종친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다음날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1435)이 상서를 하자, 세종은 “이 절은 모름지기 수리되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반드시 상서할 일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13일에 세종은 “회암사는 태조께서 존중히 여기시던 곳이며, 대비의 원불(願佛)이 걸려 있는 곳이라, 효령대군이 중수하고자 하여, 내가 곡식과 깁 약간을 내려주었다… 차라리 부고(府庫)의 전재(錢財)를 내어 불사(佛事)에 이바지함이 어떨까?”하며 첫날의 태도를 바꾸어 회암사 불전 수리와 효령대군의 개입을 인정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도승지 안숭선安崇善(1392~1452)은 “전하가 친히 나서시면, 더욱 재물이 회암사에 몰리게 된다.”라고 하면서 세종의 뜻에 반대했습니다. 16일에는 결국 세종이 “내 이미 다 아노라. 모든 시설과 규모를 줄이도록 하겠고, 내가 장차 효령에게도 이 뜻을 알리겠노라.”라고 하여 보수의 규모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리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보수의 규모를 축소해서 진행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다음 달인 5월에 보수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실 인사 효령대군의 이름이 있는 수막새가 제작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불교를 숭상하는 왕실과 유교 사회 체제를 확립하려는 관료의 대립을 이후 기록에서 계속 찾아볼 수 있습니다. 회암사 보수는 2년 뒤인 1436년에도 이어졌고 이때에도 효령대군이 주도했으며, 조정에서는 집현전 제학 안지가 "근자에 회암사 중들이 전우(殿宇)를 더 세우고 새로 불상을 만들어서 불사를 확장하는 것이 보통 때의 배나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1458년에도 회암사 동서불전 56칸을 보수하여 효령대군의 원당(願堂)으로 삼았습니다. 세조 즉위 후에도 회암사 보수가 이어졌음을 ‘천순경진(天順庚辰, 1460년)’이라는 글씨가 있는 암막새와 수막새로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각각 왕과 왕비의 상징인 용과 봉황 문양이 장식되어 있어서 왕실 후원 사찰로서 회암사의 지위가 굳건해졌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천순경진’이라는 글자가 있는 용무늬 암막새> <‘천순경진’이라는 글자가 있는 용무늬 암막새> ,
조선 1460년, 길이 33.0cm, 신수28645

<‘천순경진’이라는 글자가 있는 봉황무늬 수막새> <‘천순경진’이라는 글자가 있는 봉황무늬 수막새> ,
조선 1460년, 지름 18.0cm, 신수28760

앞서 언급했듯이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때에 회암사는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후원으로 보우(普雨, 1509~1565)가 왕실의 불사를 주관한 대표적인 사찰이었습니다. 문정왕후는 1563년(명종18)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 사망 후 회암사를 중수하기 시작하여 2년 뒤 낙성하자 이에 맞춰 불화 400점을 제작하여 개인적으로 공양하고 전국의 사찰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회암사 무차대회(無遮大會)에 참석한 뒤 병을 얻어 사망하자, 회암사와 왕실의 연은 옅어졌습니다. 1626년 항산군恒山君 이정李楨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벌인 후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어느 시기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교의 나라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왕실에서 불교 의례를 계속 지냄으로써 성리학자들과 계속 반목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유교 국가를 향한 정책은 쉽게 정착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불교는 오랫동안 신앙 생활의 한 부분을 깊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억압한다고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종 대 사림의 진출 이후 불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점차 산중불교로 전환되었으나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과 같은 고승이 등장하여 교단을 정비하고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으로 참여하여 호국불교로 역할을 했으며 전란 이후 17~18세기에 전쟁과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대규모 법회가 증가하는 등 신앙으로서의 불교의 역할은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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