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극락을 꿈꾸다 <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會圖)> : 유경희

세밀한 필선이 부처와 보살, 제자들을 그려냅니다. 붉은색, 녹색의 채색이 살아나고 분홍, 연두 등 중간색이 부분적으로 섞여 조화를 이룹니다. 남색(藍色)과 금니(金泥)가 특징적인 부분에 빛을 내줍니다.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광경은 이와 같이 장엄합니다. 불화는 종교미술입니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찰이 건립되고 불전(佛殿) 안에 불상과 불화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불화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 많습니다. 불화는 누가, 언제, 어디에 봉안한다는 기록을 남기기 때문에 어떤 연유로 조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화기(畫記)라고 부릅니다.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과 그 권속을 담은 불화의 화기에는 순조(純祖, 1790~1834)와 그의 왕비에 대한 축원이 담겨 있습니다.

<아미타불회도>, 경욱(慶郁) 등, 조선 1831년, 비단에 채색, 134.8×183.3cm, 덕수448

<아미타불회도>, 경욱(慶郁) 등, 조선 1831년, 비단에 채색, 134.8×183.3cm, 덕수448
순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다.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부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는 아들과 세 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순조가 국왕이 되어 정사(政事)를 보았던 19세기 초반에는 왕실의 외척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행해져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순조의 아들이자 훗날 효명(孝明)이라는 시호(諡號)를 받는 당시의 왕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정(王政)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지만, 21세의 이른 나이로 훙서(薨逝)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왕실의 슬픔은 매우 크고 깊었을 것입니다. 불화는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세상을 뜬 다음 해에 조성되었습니다. 부처가 앉아있는 대좌의 아래쪽 방형의 란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문구(祝願文句)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主上殿下庚戌生李氏聖壽萬歲 王妃殿下己酉生金氏聖壽齊年 嬪宮邸下戊辰生趙氏壽命千秋 世孫邸下丁亥生李氏鳳閣千秋.”

이 네 줄의 축원 대상은 왕실의 인물들입니다. ‘主上殿下’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를 의미하며 ‘王妃殿下’는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입니다. 그리고 세자빈(世子嬪), 세손(世孫) 이렇게 네 분의 안녕을 바라는 축원입니다.

<아미타불회도>의 축원문(중앙의 방형)과 화기(하단의 붉은 색과 흰색 란에 걸쳐 쓰여 있음)

<아미타불회도>의 축원문(중앙의 방형)과 화기(하단의 붉은 색과 흰색 란에 걸쳐 쓰여 있음)
불화를 발원(發願)한 세 공주

불화의 조성을 발원한 사람들은 순조의 세 딸인 명온공주(明溫公主)와 복온공주(福溫公主), 그리고 덕온공주(德溫公主)입니다. 화기에는 세 공주를 ‘坤命庚午生李氏 坤命戊寅生李氏 坤命壬午生李氏’로 적고 있습니다. 즉 ‘명온공주’라고 적는 대신 ‘곤명 경오생 이씨’라고 적어 이름대신 생년(生年)을 표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곤명은 여성을 의미합니다. 이어 상궁(尙宮)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왕실 인사들의 기원을 담아 불화의 제작을 수행한 사람들은 상궁이었습니다. 불화 제작을 주도한 이는 상궁 최씨로 화기에는 ‘引勸奉命 尙宮崔氏 尙宮辛卯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명의 딸과 상궁들은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슬픔으로 가득했을 왕실의 안녕을 위해 불화를 조성하도록 발원한 것입니다. 불화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왕세자가 극락세계에서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

화려한 나무결 문양[木理文]의 대좌 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앉아 설법(說法)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의 주위 상·하단에는 보살(菩薩), 제자(弟者) 등이 빼곡히 서서 공손하게 아미타불의 설법을 듣습니다. 하단에는 둥근 두광(頭光)과 긴 방형의 거신광(擧身光)을 등진 4명의 보살과 금강저(金剛杵)와 여의(如意)를 든 제석천(帝釋天)·범천(梵天)이 있고 불단(佛壇)의 위쪽에는 4명의 보살과 10대제자(十大弟子), 사자관(獅子冠)을 쓴 건달바(乾達婆), 코끼리관을 쓴 야차(夜叉) 등이 부처의 설법을 경청합니다. 부처와 보살, 제자를 그린 불화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입니다.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고 해석되는 극락은 옛사람들이 꿈꾸었던 죽음 이후의 이상세계였습니다. 19세기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서구 열강이 문호개방과 근대화를 요구하는 등 숨 가쁜 변화의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어려움을 종교적인 힘으로 타개하고자 타력적인 구복 신앙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신앙이었던 불교에 의지하여 염불수행을 통해 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으며 이에 따라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그 세계를 가시화한 불화가 다수 조성되었습니다.

불화를 그린 승려들

불화는 5명의 화승(畫僧)이 제작하였습니다. 맨 머리에 이름을 올린 승려의 이름은 경욱(慶郁)입니다. 그는 주로 현재의 서울지역인 한성부(漢城府)와 주변지역인 경기도(京畿道)를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였으며, 불화를 수행의 업으로 삼았습니다. 불투명색인 진채(眞彩)의 붉은색과 녹색으로 극락의 광경을 장엄하게 표현하였고 값비싼 안료인 금(金)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화면 하단에 배치된 보살들의 신광(身光) 안쪽에 채색된 분홍과 옥색(玉色)이 산뜻한 느낌을 주면서 화면을 밝게 꾸미고 부처와 보살이 함께 하는 이 공간이 극락임을 상징해주는 듯합니다.

수락산 내원암

불화를 봉안(奉安)한 곳은 일찍부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에서 지정한 경기도 수락산(水落山)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입니다.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아들이 없었던 정조(正祖, 1752~1800)를 위해 용산화상(髶山和尙)과 용파대사(龍坡大師)가 300일 기도를 올렸고 그 정성 때문인지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순조의 탄생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내원암은 이후 왕실의 안녕과 선조(先祖)의 명복(冥福)을 기원하는 사찰이 되었습니다. 이 사찰의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은 국왕인 순조가 직접 써서 내렸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으로 내원암의 전각은 모두 불타 사라졌지만 한 점의 불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간절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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