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유묵에 담긴 안중근의 유언 : 서윤희

안중근, 안중근유묵, 1910년 3월, 137.4x33.4cm, 보물, 신수1183

안중근, 안중근유묵, 1910년 3월,
137.4x33.4cm, 보물,
신수1183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40여 일 동안 쓴 수백 점의 유묵에 대한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열망을 담았습니다.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확인된 유묵은 62점이고, 그 가운데 26점이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庸工難用連抱奇材(용공난용연포기재)”라는 유묵의 한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재주가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커다란 기이한 재목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뜻으로, 큰 인물이 아니면 뛰어난 인재를 기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유묵은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것으로 왼쪽에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서(書)라고 적혀 있고, 그 밑에 약지가 없는 안중근의 왼손바닥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대한독립을 위한 인재 등용

“글씨가 곧 그 사람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글씨는 쓴 사람을 닮는다는 말이기도 하고,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는 뜻이기도 하며, 글씨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란 의미입니다. 이 글씨를 포함한 안중근의 유묵에는 그의 젊은 혈기와 활달한 기운이 고스란히 배어 나오는 듯합니다. 그 기운은 바로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을 구해보고자 하는 열망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에 항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안중근의 대한독립을 위한 굳은 의지와 조국에 대한 기대, 동양의 평화를 기원하는 유묵들의 내용은 힘찬 그의 필력을 통해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유묵의 “庸工難用連抱奇材”라는 글귀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한 구절을 변형한 것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자사(子思, 기원전 492년~기원전 431년경)가 위나라 임금에게 구변(句變)이란 유능한 장군을 천거하였습니다. 그는 싸우면 이기는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위나라 임금은 그가 관리로서 달걀 두 개를 뇌물로 얻어먹었다는 이유로 쓰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자사는 성인이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는 것은 장인이 나무의 장점만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훌륭한 장인은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구기자나무나 가래나무가 조금 썩었다고 하여 그 큰 재목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杞梓連抱而有數尺之朽 良工不棄].

안중근은 『자치통감』에서 “훌륭한 장인[良工]은 조금 썩었다고 하여 커다란 구기자나무나 가래나무[杞梓連抱]를 버리지 않는다[不棄]”는 표현을, “솜씨 없는 장인[庸工]은 아름드리 기이한 재목[連抱奇材]을 잘 다루지 못한다[難用]”는 글귀로 바꾸었습니다. 『자치통감』의 글귀는 ‘자그마한 단점 때문에 훌륭한 인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면 안중근 유묵에서는 ‘아름드리 큰 나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훌륭한 장인 같은 인재를 기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영원한 대한의 청년 안중근

안중근은 1879년에 태어나 1910년 순국할 때까지 서른 두 해를 살았습니다. 당시는 국가의 운명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을 호시탐탐 노렸고,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열강의 자본과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정치체제를 바꾸려 했던 위로부터의 갑신정변은 실패하였고,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꿈꿨던 동학농민운동은 일제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일제의 힘을 빌어 추진된 갑오개혁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국모가 일제의 무력에 무참하게 쓰러지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근대적 개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대한의 지식인들이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으로 구국의 길을 모색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대한제국은 더 이상 국권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던 안중근이지만 그는 평소에 친구와 의(義)를 맺는 일,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일, 총으로 사냥하는 일, 좋은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일을 즐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고자 상하이에 갔다가 르 각(郭元良, Le Gac) 신부를 만났습니다. 르 각 신부는 “옛글에 이르기를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다 했으니 너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서 먼저 네가 할 일을 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해야 할 일이란 “첫째 교육의 발달, 둘째 사회의 확장, 셋째는 민심의 단합, 넷째는 실력의 양성”입니다.

르 각 신부의 말에 크게 깨달은 안중근은 대한독립을 이루는 그 날까지 그렇게 즐기던 술을 끊기로 맹세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무지를 깨우치고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고 평양에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럼에도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거세진 일제의 탄압에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재기를 도모하면서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어 대한독립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을 써서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은 세 발의 총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습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사 직후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외치던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후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라 공소도 포기하였습니다.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 감동한 법원과 감옥소의 직원들은 그가 직접 쓴 글씨를 얻고자 하였고, 그는 수백 건의 글씨를 기꺼이 써주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최후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중략)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 간절한 바람대로 국권이 회복되었고 그는 천국에서 춤추며 만세를 불렀겠지만 우리는 그의 유해를 그렇게도 그리던 독립된 고국으로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의 민족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가 유묵에 쓴 말처럼 “훌륭한 장인 같은 인재를 기용”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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