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고만해 일족 조상비 (高萬海一族造像碑) : 강건우

조상비(造像碑)는 판이나 방형 기둥처럼 생긴 돌 위에 불상이나 글씨 등을 새긴 것을 말합니다. 숭상하는 인물이나 사적(事蹟)을 기념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비(碑)에 불·보살상이 더해져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존하는 조상비를 검토해보면, 중국에서는 조상비가 북위(北魏, 386~534) 5세기 후반에 활발히 조성되기 시작하여 6세기에 크게 유행하였고, 이후 당대(唐代, 618~907)까지도 계속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상비, 부처의 세계를 새기다

조상비는 일반적으로 방형의 돌에 불상과 명문을 장식합니다. 비의 표면을 장식한 ‘상’과 ‘글’은 종교적 시각 자료로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만해(高萬海) 일족이 발원한 조상비도 그러한 예입니다. 당 현경(顯慶) 5년(660)에 고만해의 일족이 발원한 조상비는 오늘날까지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조상비의 앞면과 뒷면은 상・중・하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1.<고만해 일족 조상비>, 660년, 대리암, 높이 96.60cm, 폭 46.13cm, 두께 13.65cm, 덕수5666 ,2.<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앞면 상단 1. <고만해 일족 조상비>, 660년, 대리암, 높이 96.60cm, 폭 46.13cm, 두께 13.65cm, 덕수5666
2.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앞면 상단

먼저 앞면을 살펴보면, 상단 중앙에는 두 다리를 아래로 내린 의좌(倚坐)의 불상과 좌우로 보살입상을 묘사하였고, 그 위로 단층의 탑과 괴수문(怪獸文), 그리고 꽃줄을 든 비천을 조각하였습니다. 6세기 조성된 대부분의 의좌상에는 미륵(彌勒)이라는 존명이 명시된 경우가 많으므로 의자에 앉은 자세 자체가 도상적인 측면에서 미륵을 암시합니다. 양측 가장자리에는 연꽃 또는 나뭇잎처럼 보이는 모티프와 그 위에 서서 꽃줄을 들고 있는 인물상을 표현하였습니다. 상단에는 감실의 구획을 하지 않았지만, 상을 유난히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형태로 조각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부분은 처음부터 계획한 공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즉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처음에 조각한 부분을 추가로 깊게 판 뒤, 상단을 다시 조각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앞면 중단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앞면 중단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앞면 하단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앞면 하단

앞면의 중단에는 두 개의 감실을 좌우로 만들고 각각 오존(五尊)을 안치하였습니다. 두 감실의 구성은 동일합니다. 감실 안에는 중국식[褒衣博帶式] 복제를 착용한 본존불이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 불상의 오른쪽 어깨에서 넘어온 가사는 가슴을 덮지 않고 배까지 늘어지다가 왼팔에 걸쳐지며, 이로 인해 노출되는 가슴 부분에 내의가 표현되었습니다. 본존불 좌우에는 합장한 나한상과 화려하게 장식한 보살상을 묘사하였습니다. 저부조로 조각한 나한상에서 선(線)적인 느낌을 강조하였다면, 고부조로 조각한 보살상에서는 몸의 형태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왼쪽 감실 중앙의 대좌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앉아 있고, 좌우에는 공양자가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반면 오른쪽 감실 대좌 앞에는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사자와 역사(力士)가 보입니다. 감실 위는 여러 갈래의 꽃줄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중단의 감실을 구획하는 세 개의 기둥에는 공양자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앞면 하단에 새겨진 조상기는 비교적 또렷하고 결손부가 적어 명문의 내용 전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단 비면의 조상기에는 “대당(大唐) 현경(顯景) 5년(660) 7월 25일 고만해(高萬海)가 돌아가신 부모와 선조를 위해 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가로 2.8cm, 세로 2.8cm의 정간선(井間線)을 그어 만든 정방형 네모 안에 한 자씩 썼고, 마지막 행의 마지막 두 칸에는 각 두 자씩 썼습니다. 당나라 글씨는 북위 글씨와는 달리 획이 조금 가늘고 자형은 주로 장방형입니다. 조상기에는 북위와 당나라풍의 해서(楷書)가 섞여 있는데, 북위풍의 글자들이 더 많은 편입니다. 이 가운데 ‘雲’과 ‘正’자는 남북조풍으로 쓴 백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654)와 닮았고, 북위에서 주로 쓰인 이체(異體)의 ‘兄’자는 신라의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550년경)와 <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561), 백제의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567)의 ‘兄’자와 같아 한국과 중국 글씨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방형의 글자가 많고 필법에서는 획의 시작 부분이 강조되었습니다.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뒷면<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뒷면

<고만해 일족 조상비> 뒷면의 중단과 하단<고만해 일족 조상비> 뒷면의 중단과 하단

다음으로 조상비의 뒷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뒷면 상단은 보주를 들고 몸을 꼬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된 점 외에는 앞면에 비해 상의 수가 적고 구성이 단순합니다. 상단의 감에는 단독의 불좌상이 있습니다. 이 불좌상은 두 손을 소매에 넣고 있으며, 가슴 앞으로는 내의가 보입니다. 감실 안에는 사선 방향으로 정질의 흔적이 남아있어 흥미롭습니다.

중단의 감실에는 불좌상을 본존으로 하는 삼존상을 배치하였습니다. 불좌상의 오른쪽 어깨에서 넘어온 가사는 U자형으로 다리까지 늘어지다가 왼팔에 걸쳐지고, 가슴 부분에는 내의가 표현되었습니다. 양 옆에는 팔찌 등으로 장식한 보살이 천의를 U자형으로 길게 늘어뜨리며 서 있습니다. 감실 옆에는 두 그루의 도식화된 형태의 나무가 있고, 빈 공간에는 여러 방향으로 정을 가한 흔적이 있습니다.

하단은 명문을 새겨 넣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생각되나 실제로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조상비의 앞면과 뒷면을 비교해보면, 앞면의 경우 빈 공간 없이 글자를 새긴 반면, 뒷면에는 빈 공간이 많고 정질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로 보아 발원자가 이미 완성된 조상비를 구입한 뒤 명문을 추가로 새겼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1.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왼쪽면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왼쪽면

  • 2. <고만해 일족 조상비>오른쪽면 <고만해 일족 조상비>의 오른쪽면

  • 3. <고만해 일족 조상비>상단 용머리<고만해 일족 조상비>상단 용머리

마지막으로 옆면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양 옆면에는 모두 두 개의 감실을 위아래로 배치하였습니다. 감실 안에는 연화좌에 앉아 두광과 중국식 복제를 갖추고 선정(禪定)에 든 불좌상을 안치하였습니다. 그 위로는 용의 머리가 정교하게 조각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만해 일족이 만든 조상비는 세부 표현이 섬세하고 사실적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당 영휘(永徽) 4년명(653) 조상비가 있습니다. 두 조상비 모두 7세기 당대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기념비적인 성격의 중국 조상비는 주요 교차로, 마을 입구, 사원 등에 주로 세워졌습니다. 발원자들은 공적의 장소에 조상비를 제작하여 공덕을 쌓고, 동시에 대외적으로 그들의 바람을 널리 알릴 수 있었습니다. 즉 발원자들이 그들의 염원을 담아 조상비를 조성하는 것은 붓다의 세계로 가기 위한 일종의 신앙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상비는 역사적, 미술사적으로 풍부한 시각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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