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에서 가져온 벽화 단편 : 김혜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중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에서 가져온 벽화가 여러 점 소장되어 있습니다. 18세기 청(淸, 1644-1911)에 복속되면서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줄곧 다양한 민족, 언어, 문화가 공존해왔습니다. 또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크게 번영한 실크로드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부터 이 지역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서역(西域)’이라고 불렀고, 현재는 동투르키스탄, 중국령 중앙아시아라는 명칭이 통용됩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변방이었던 이 지역은 고대 유물이 발견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는 러시아와 영국 정도였습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폈고,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러시아와 영국 군인들이 정치적, 군사적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이 지역을 여행했고, 이러한 와중에서 오랫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고대 왕국의 유적과 유물을 만난 것입니다. 특히 유기물로 이루어진 문서, 직물은 내륙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그 보존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양호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러시아,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이 지역에 학술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조사하며 수집한 많은 유물은 자국으로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일본이 이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교토 니시혼간 사(西本願寺)의 문주(門主)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조직한 탐험대가 이 지역을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조사한 것입니다. 오타니 탐험대의 수집품은 1914년 오타니가 문주(門主)에서 물러나 근거지를 중국으로 옮기면서 여러 기관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 일부가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고, 이후 1945년 새로 개관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

석가모니가 수행자였을 때(연등불수기 벽화의 일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10-12세기

석가모니가 수행자였을 때(연등불수기 벽화의 일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10-12세기

이 그림은 20세기 초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유물 가운데 하나로, 원래 높이가 2.5m에 달하는 큰 벽화의 일부입니다. 벽화에는 석가모니가 수많은 전생(前生) 중 수마티(Sumati, 문헌에 따라 이름은 다르게 표현되기도 합니다)라는 이름의 수행자로 태어났을 때, 당시의 부처인 디팡카라(Dipamkara) 또는 연등불[燃燈佛, 현재의 시점에서는 과거불(過去佛)]을 만난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설화는 불교도들 사이에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수마티는 우선 디팡카라 부처에게 꽃을 바치고, 이어 부처가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땅바닥에 폅니다. 이러한 수마티의 공양을 받은 디팡카라는 그에게 훗날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된다고 예언합니다.

원래 그림에는 가운데 디핑카라 부처가 서 있고 여러 인물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연등불수기 벽화 복원도,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10-12세기 ©Digital Archives Research Center, Ryukoku University

연등불수기 벽화 복원도,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10-12세기 ©Digital Archives Research Center, Ryukoku University

하나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림은 여러 장면이 압축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을 미술사가들은 ‘연속 도해(continuous narrative)’라고 부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벽화 단편에는 수마티가 부처를 향해 서 있으며, 양손에는 그에게 바칠 푸른 꽃을 들고 있습니다. 수마티는 그림 하단 부분에 다시 등장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 단편에는 머리카락을 땅에 펼쳐놓기 위해 엎드리고 있는 수마티의 다리와 발이 보입니다. 수마티는 수행자라기보다는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띠는데, 당시 사람들이 석가모니의 전생을 보살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묘사는 다소 평면적이고 형식화되어 있으며, 특히 부풀어 오른 듯한 얼굴, 긴 허리, 가는 팔에서는 해부학적 정확성에 대한 무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휘날리는 화려한 색의 천의 자락, 다채로운 모양의 장신구, 보석 장식 등은 특별한 존재로서 보살이 지닌 지위와 위력을 강조합니다.

투루판 위구르왕실이 발원한 그림

원래 이 벽화는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Turpan, 吐魯番) 지역의 대표적 종교 유적인 베제클리크(Bezeklik, 柏孜克里克) 석굴사원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것입니다. 투루판은 고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고, 남쪽에 위치한 아이딘 쿨은 해발 마이너스 154m로 사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곳입니다. 동서교역의 주요 거점일 뿐만 아니라 북방 초원지대로 나아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투루판에는 역사적으로 여러 세력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차사국(車師國), 전량(前涼), 국씨고창국(麴氏高昌國) 등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640년부터 8세기 후반까지는 당(唐), 9세기에서 14세기까지는 위구르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뜻을 지닌 베제크리크 석굴은 화염산(火焰山) 기슭의 무르투크(Murtuk, 木頭溝) 강을 면한 암벽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전경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전경

80여 기의 석굴이 있었지만 현재는 50여 기가 남아 있습니다. 석굴 개착은 5세기에 시작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굴과 벽화는 대부분 위구르 지배기에 만들어졌습니다.

텐산(天山) 이북에 건립된 위구르 왕국은 마니교를 믿었지만, 9세기 왕국의 붕괴 후 투루판으로 진출한 위구르인들은 이곳 주민 다수가 신봉하는 불교로 점차 개종했습니다. 10세기 후반부터 위구르 지배층이 불교 조상(造像)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에도 다수의 석굴이 조성되었는데, 이 시기 베제클리크 석굴에서는 앞서 살펴본 벽화와 같은 석가모니 전생을 소재로 한 그림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그림을 부르는 명칭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원화(誓願畫, pranidhi scene)’라는 용어가 통용되며, 학자에 따라 ‘공양화(供養畫)’, ‘본행경변(本行經變)’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원화 중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으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아 흥미로운데, 이는 주요 발원 세력이 왕실이었다는 점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베제클리크의 여러 석굴에는 왕실 사람들이 공양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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