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수어영상] 공예품에서 찾은 한국의 미 - 예술가 유강열
  • 등록일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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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영상] 공예품에서 찾은 한국의 미 - 예술가 유강열

[수어영상] 공예품에서 찾은 한국의 미 - 예술가 유강열  

한평생 한국의 미를 찾고자 했던 예술가의 꿈. 공예품에서 찾은 한국의 미, 예술가 유강열
 
염색가이자 국내 1세대 판화가, 공예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기증자 유강열 선생. 열정적인 활동가였던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배운 미술 교육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 공예의 서막을 열었다.
 
<곽대웅 전 홍익대학교 교수, 유강열 선생 제자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염색이나 직조공예가 완전히 침체되어 있을 때 그 붐을 일으키신 분이시고, 또 교육을 담당하셨고, 우리나라 현대 염색공예에 발판을 마련하신 분이에요.
 
<신영옥 섬유미술가, 유강열 선생 제자 인터뷰>
말하자면 한국 공예사에 기초를 다지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6.25 전쟁 피난 시절 통영에서 나전장인 김봉룡을 만난 유강열 선생은 전통 공예에 눈을 뜨게 되고, 1950년 김봉룡과 함께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 강습소’를 세워 전통 공예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 유강열 선생 제자 인터뷰>
모든 것을 한국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어서 현대로 가려고 하셨고, 우리 것을 살려서 일본과는 다른 색을 가지려고 노력하셨어요.
 
한국 예술의 현대화를 위해 더 나아가다.
일찍이 세계의 예술기조에 눈을 뜬 그는 가장 한국적인 조형미를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민화를 토대로 한국적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했고 한국적 색감이 선명한 예술세계를 추구했다. 또한, 1960년에는 홍익대학교에 공예과를 신설하여 현대적 공예 교육을 통해 후학을 길러내는 한편 연구에도 매진했다. 나아가 그는 산업현장에서 작업하면서 한국적 아름다움의 현대적 표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영감의 원천 전통 공예품을 수집하다.
 
<신영옥 섬유미술가, 유강열 선생 제자 인터뷰>
미술학도들은 인사동에 화방도 많고 그러니까 가끔 가잖아요. 골동상에 앉아계시는 걸 제가 몇 번을 봤어요.
 
<곽대웅 전 홍익대학교 교수, 유강열 선생 제자 인터뷰>
수중에 돈이 없으면 조교한테 전화를 거세요. 학교 월급을 가불해서도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꼭 사시는 거예요.
 
그는 토기, 분청사기, 목칠공예품, 직조물 등 한국적 색채가 담긴 것은 무엇이든 수집했다. 수집품은 작가로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옛 공예품에 담긴 공예기술을 보존하고, 이를 발전시키고자 애썼다.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인터뷰>
전통에서 어떤 모티브를 잡아서 당신의 작품 활동에 활용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고민이 깊이 배어 있는 수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증품과는 상당히 차별화된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전통문양을 보여주는 민예품들, 민속품들, 이런 것들이 (수집품에) 많이 들어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신영옥 섬유미술가 유강열 선생 제자 인터뷰>
공예학교를 설립해서 공예박물관을 부설로 만드는 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컬렉션이니까 얼마나 가치를 갖고 계셨겠어요.  
 
유강열 선생에게 한국의 미는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무궁무진한 디자인의 원천이었다.
 
1976년 별세 후 2000년에 이르러 기증된 그의 작품과 수집품들.
그의 이런 뜻을 이어받은 가족들은 유강열 선생이 별세한 뒤 그가 모았던 민화와 민예품 등 300여 점과 그의 작품들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우리의 옛것에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냈던 유강열 선생. 그의 전통 공예 사랑은 ‘기증’을 통해 우리 모두의 것으로 승화되었다.
 
우리 공예에 담긴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한 그의 꿈은 기증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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