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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등록일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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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수어영상

 [듣고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자막>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이 신하들과 한강유역을 ‘순수’하고 이를 기념하여 북한산의 봉우리에 세운 비입니다.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약 155cm, 곧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의 평균키보다 조금 더 큽니다. 비는 덮개돌과 몸돌, 받침돌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그 가운데 덮개돌은 발견되지 않았고 받침돌은 비봉 현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박물관의 전시품은 몸돌입니다.

 

천년을 훌쩍 넘겨 야외에 노출되어 있던 터라, 파손과 손상을 많이 입었습니다. 비문은 열두 행에, 각 행마다 글자가 스물한 자에서 스물두 자씩인 듯하나, 읽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게다가 이끼가 비를 잔뜩 덮어 조선 후기까지도 그 정체가 묘연했고, 막연하게 무학대사와 관련된 비(무학대사왕심비無學大師枉尋碑) 또는 글씨 없는 비(‘沒字碑’) 등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문헌 해석 능력을 지닌 당대의 학자들이 비의 역사적인 가치를 읽게 됩니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는 열 자 정도를 판독하고 ‘진흥왕순수비’라 이름 붙였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1816년 북한산 승가사僧伽寺를 들린 길에 비를 찾아, 비문에서 진흥왕의 참 ‘진眞’자를 확인하고 그 실체를 확정했습니다. 특히 김정희는 이듬해까지 비문을 보다 면밀하게 고증하여 예순여덟 자를 새롭게 판독했습니다. 이때의 조사 내역과 판독 성과를 비의 옆면에 기재했습니다.

 

이 비는 언제 세워졌을까요? 안타깝게도 비문에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연호나 간지가 없어 건립 시점을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흥왕이 555년(진흥왕 16) “북한산으로 순행하여 강역을 넓혀 정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물론 이때일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만, 걸리는 한 가지가 비문 중의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용어입니다.
진흥왕은 13년 뒤인 568년(진흥왕 29)에 이르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과 568년 10월에 세워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ㆍ<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건립 사실과 엮어보면, 북한산의 비는 그 이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에서 진흥왕은 ‘태왕太王’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진흥왕은 그처럼 강한 힘을 들어, 경주에서 먼 한강유역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경계를 둘러보며, 신라의 영토를 다졌습니다. 아울러 각 지방의 백성들을 만나 마음을 살피고 수고를 다독였습니다. 곧 비의 건립은 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힘을 중앙으로 한데 모으며 다진, 국왕의 위상과 체제의 현황을 각지에 알리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현재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비록 본래의 자리를 떠나 있지만, 당대의 신라, 그리고 그 국왕이 비를 세워서 높이려 했던 목적을 이어가듯, 이곳 한강변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서있습니다. 신라실에서 직접 비를 만나 과거의 역사적 현실을 떠올려보시고 만약 여러분께서 자신의 삶으로 비를 세운다면 어떤 업적을 새길 수 있을지도, 한번 생각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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