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저(素錦褚)
왕실일생/국장(國葬)·예장(禮葬)
흉례(凶禮)/국장(國葬)·예장(禮葬)
장례_관을 보호하는 물품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상)(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上))
1689
소금저(素錦褚)는 왕이나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을 덮어서 보호하는 데 사용된 흰색 비단으로 만든 덮개이다.
소금저도(素錦褚圖) 는 소금저를 그린 그림이다.
‘소금’은 흰색 비단, ‘저’는 솜옷, 핫옷, 구의(柩衣)를 뜻한다. 소금저는 조선시대 국장(國葬)의 발인(發靷) 행렬에서 재궁을 견여(肩輿) 등에 옮겨 실을 때, 재궁을 덮어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장사지내는 곳으로 출발할 때 빈전(殯殿)에 모셔둔 재궁을 견여에 실어 대여(大輿)로 옮겨 싣거나, 장지(葬地)에 도착한 후 대여에 담긴 재궁을 꺼내어 다시 견여에 옮겨 싣고 현궁(玄宮)으로 운반할 때에도, 그 때마다 소금저로 재궁을 덮어 보호하는 기능을 하였다.
소금저는 우선 아래에 지지할 나무 4개를 깔아 바닥 틀로 삼고, 이 위에 기둥을 6개 세운 뒤에, 기둥 위에 나무 4개를 가로로 걸어 소금저의 뼈대를 만들었다. 흰색 종이로 뼈대의 안팎을 발라서 집과 유사한 기본 형태를 갖춘 후, 흰색 모시 베로 소금저의 바깥을 바르고, 그 위에 다시 흰색 비단을 덧씌웠다. 소금저의 지붕은 둥그런 원형에 가깝도록 만들었다. 소금저는 재궁을 넉넉하게 덮어 보호할 수 있도록 가로, 세로, 높이 등을 모두 재궁보다 2~3촌 이상 더 크게 제작하였다.
소금저(素錦褚)는 왕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을 덮는 집 모양을 닮은 흰색 비단 덮개이다. 국장(國葬)의 발인(發靷) 행렬에서 재궁을 견여(肩輿) 등에 옮겨 실을 때 소금저로 재궁을 덮어 보호하였다. 장지로 출발할 때 빈전(殯殿)에 모셔둔 재궁을 견여에 실어 대여(大輿)로 옮겨 담고, 장지에 도착한 후 대여에 담긴 재궁을 꺼내어 다시 견여에 옮겨 실고 현궁(玄宮)으로 운반하였다. 이 때마다 소금저로 재궁을 덮었다. 소금저의 외관은 집 모양과 비슷하며, 제작 방식도 집 짓는 과정과 유사하다. 우선 하지대목(下地臺木) 4개를 깔아 바닥 틀로 삼고, 세로로 기둥을 6개 세운 후 그 위에 상배방목(上排枋木) 4개를 가로로 걸어 소금저의 뼈대를 만든 후, 흰색 종이로 뼈대의 안팎을 발라서 집과 유사한 기본 형태를 갖춘다. 이어서 백저포(白苧布: 흰색 모시베)로 소금저의 바깥을 바르고, 다시 흰 비단을 덧씌운다. 소금저의 지붕은 (실제 집 지붕과는 달리) 둥그런 원형에 가까우며, 재궁을 덮을 수 있게 높이, 길이, 너비를 모두 재궁보다 1촌 이상 더 크게 제작하였다.
이 소금저는 1688년(숙종 14) 음력 8월 26일에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가 승하한 후, 12월 16일에 휘릉(徽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에 안장하기까지 약 5개월 동안 봉행된 국장 과정에서 제작·사용된 것이다.(박봉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