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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왕자 복성군(福城君) 태항아리(胎壺)와 태지(胎誌)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 왕녀 등의 태를 풍수지리로 볼 때 길지(吉地)로 판단되는 산(대개 큰 산에 연결된 산이며 모습은 작고 둥글며 경사가 가파르다)의 정상에 묻었습니다. 이를 태실(胎室)이라 부르는데 이 태실은 지하 석함(石函) 안에 태를 담은 태항아리, 태어나고 태를 묻을 때의 사주<(四柱: 즉 연월일시(年月日時)>를 새긴 태지(胎誌) 등을 넣었습니다. 이 때 태지는 네모지게 만든 대리석 돌로 만듭니다. 그리고 지표에는 태비(胎碑)로 불리는 작은 비석을 세우는데 여기에는 주인공의 이름과 태어난 때 태를 묻을 때의 사주(四柱)를 새깁니다. 그리고 태를 묻은 산인 태봉(胎峯)의 둘레에는 함부로 들어가거나 경작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금표(禁標)란 글씨를 새긴 비석을 새웠습니다.
조선왕조의 태실 제도는 이전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이 태실은 병이 없이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목적에서 마련한 것인데, 왕실의 경우는 태평한 나라의 계승 등도 포함됩니다. 왕자가 왕으로 즉위할 경우 그 태실은 지표상에 마치 부도와도 같은 석조물을 만들고 그 주위에는 팔각 난간을 두르며 큰 비석도 세우게 되는데 이를 소위 가봉(加封)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조성된 많은 태실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호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왕가(李王家: 일제가 한일강제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격하 시킨 이름)의 경제력이 부족하였고 특히 환전(換錢) 대상으로 태실(특히 도자기로서의 태항아리)을 도굴하는 경우가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왕가는 주요 태실에서 태를 이봉하여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능역에 새 태실을 조성하였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태항아리와 태지는 서삼릉 능역에 이전된 태실과 관련이 없습니다. 서상호씨가 수집하여 2009년 11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하여 입수되지 않아 원래 태봉, 태실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복성군 태지와 태항아리, 태항아리 대(大) 높이 43.7cm, 증8120, 소(小) 높이 26.2cm, 태지 21.7×21.0×5.4cm, 서상호 기증, 증8121, 증8122

복성군 태지와 태항아리, 태항아리 대(大) 높이 43.7cm, 증8120, 소(小) 높이 26.2cm, 태지 21.7×21.0×5.4cm, 서상호 기증, 증8121, 증8122
태항아리가 두 개입니다. 이는 작은 항아리 안에 태를 넣고 그 항아리를 큰 항아리에 담기 때문입니다. 이 태항아리와 태지를 지하 석함에 담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태실을 만듭니다.

이에 앞서 동국대학교 교수 황수영(黃壽永)은 한 고미술품 가게에서 이 태지의 명문을 채록하여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1976년)에 실었습니다. 또 1996년 한국미술품경매전에 태항아리와 태지가 경매 대상품으로 출품된 바 있으며 관련 책에도 수록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1976년 이전에 이미 원래의 태봉, 태실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지의 명문은 皇明正德四年九(황명정덕사년구)/月十六日子時生(월십육일자시생)/王子鶴壽阿只氏胎(왕자학수아지씨태)/正德十年三月初(정덕십년삼월초)/六日丑時藏(육일축시장)입니다. 이로 볼 때 중종 4(1509)년 9월 16일 자시(23시~01시)에 태어난 왕자이며 태는 5년 후인 중종 10(1515)년 3월 6일 축시(01시~03시)에 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성군 태지 명문

복성군 태지
태지는 대리석이나 오석(烏石)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운데 줄에 있는 ‘왕(王)’자가 다른 줄보다 한 단 더 높게 새겨 있습니다. 이는 왕을 높인 것입니다.

복성군 태지 명문 채록 (황수영,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 1976년, 497면)

복성군 태지 명문 채록
(황수영,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 1976년, 497면)

태지에 적힌 학수(鶴壽)는 왕자의 아명(兒名)입니다. 태지에 이처럼 본명 아닌 아명을 적은 것은 조선 왕실의 다른 태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수는 학과 같이 장수하였으면 하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아명과 생년 사주로 인하여 학수는 중종의 서장자(庶長子: 왕비 소생인 대군(大君)이 아닌 후군 소생인 군(君)으로서 장남)인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전국 태실에 있는 태비 명문(銘文)들과 복성군 태지 명문이 일치되는 곳은 없습니다. 또 복성군 태실이라 전해내려 오는 태봉(胎峯)도 없습니다. 복성군의 태지와 태항아리가 있었던 태실, 태봉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래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복성군의 태어난 날, 아명(兒名)이 학수(鶴壽)인 것, 처음 봉호(封號)가 서성군(瑞城君)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날 밤에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아들 미(嵋)를 낳았다.> 『중종실록』 4(1509)년 9월 15일
<전교하였다. “-중략-지금 왕자군의 사부(師傅)들 중에 학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 늘 학수(鶴壽)<곧 복성군 이미(李嵋)의 아이 때 이름이다.>의 처소에 가서 가르치되, 아울러 예법도 가르치도록 하라.”> 『중종실록』 11(1516)년 11월 15일
<서성군(瑞城君) 이미(李嵋)를 복성군(福城君)으로 고치고---> 『중종실록』 12년 6월 28일

복성군<중종 4(1509)~중종 28(1533)년 6월 1일>
중종의 왕자, 경빈박씨(敬嬪朴氏)의 소생, 이름은 미(嵋), 김안로(金安老)가 저지른 세자(世子, 후에 인종 임금)의 저주 사건을 함께 일으킨 혐의로 어머니(경빈박씨)과 함께 귀양갔다가 사사(賜死)되었습니다. 중종 36(1541)년 죄가 없음이 밝혀져 신원되었습니다. 시호는 정민(貞愍)입니다.

조선 명종 임금 태실

조선 명종 임금 태실
(충청남도, 『문화재대관』, 1996년, 526면)
충남 서산군 운산면 태봉리 산1번지에 있습니다.
작은 비석은 왕자 때인 중종 38(1538)년에 세운 비석입니다.
팔각난간을 두르고 큰 비석을 세웠는데 이는 평범한 왕자의 태실에서 국왕 태실로 가봉(加封)된 모습입니다. 큰 태비(胎碑)가 두 개인 데 하나는 임금으로 즉위하며 가봉할 때인 명종 1(1546)년에 세웠고, 다른 하나는 1546년에 세운 비석이 파손되자 숙종 37(1711)년에 추가로 세운 것입니다.
*왕자 때 세운 태비 명문: 大君椿齡阿只氏胎室(前)嘉靖十七年二月二十一日卯時立(後)
*1546년에 세운 태비 명문: 主上殿下胎室(前)嘉靖二十五年十月日建(後)
*1711년에 세운 태비 명문: 主上殿下胎室(前)嘉靖二十五年十月日建\後一百六十五年辛卯十月改石(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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