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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여지무늬 허리띠 - 여지(荔枝), 이국적 매력에 취하다 : 민보라

중앙에 앵무새를 두고 그 주변을 여지 넝쿨로 두른 화려하고 이국적인 허리띠입니다. 열매들은 가늘고 섬세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고, 여지 열매의 불규칙한 껍질 표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금동 여지무늬 허리띠[荔枝金帶]는 안동 태사묘(太師廟)에 소장된 허리띠와 함께 고려시대의 복식 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일자형의 긴 띠로 현재는 가죽 또는 천으로 된 띠 부분은 썩어서 없어지고 띠를 꾸몄던 허리띠 꾸미개[銙板]만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허리띠를 야자대(也字帶)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허리띠인 각대(角帶)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야자대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벨트처럼 한쪽 끝에 고리모양의 버클이 있어 허리를 꽉 조이게 착용할 수 있습니다. 허리띠에 화려하게 장식된 여지는 '리찌[Lychee, Litchi]'라고 부르는 열대과일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과일입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과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지를 이국적이고 진귀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여기에 길상(吉祥)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금동 여지무늬 허리띠 꾸미개, 고려, 10.8×4.5cm(왼쪽), 3.5×3.5cm(오른쪽), 덕수5753

금동 여지무늬 허리띠 꾸미개, 고려, 10.8×4.5cm(왼쪽), 3.5×3.5cm(오른쪽), 덕수5753

진귀한 과일, 여지 이야기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은 그의 시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서 가죽신의 아름다움을 ‘황금실로 꿰매 놓으니 여지빛과 같다[黃金入縷荔枝光]’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여지는 화려하고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졌습니다. 특히 12~14세기의 고려시대는 여지무늬가 가장 아름답고 다양하게 나타난 시기였습니다. 허리띠뿐만 아니라 장신구와 도자기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불교회화에서는 여지무늬가 표현된 법의를 걸친 부처와 보살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허리띠는 여지와 앵무새를 같이 표현하여 이국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지무늬는 조선시대에도 나타나는데 여지와 석류, 복숭아 등 길상의 의미가 있는 열매를 함께 배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여지는 복숭아씨[核桃], 여지와 비슷한 종의 열매인 규원(袿圓)과 함께 둥근 모양의 열매인 삼원(三元)을 상징하는데 다산과 총명함을 의미합니다.

여지 모양의 장신구, 고려, 길이 3cm, 신수11846

여지 모양의 장신구, 고려, 길이 3cm, 신수11846

과일 무늬 화장품 용기의 여지무늬(왼쪽), 숙신공주(淑愼公主) 무덤 출토, 조선 1650년경, 높이 4.5cm, 덕수6468

과일 무늬 화장품 용기의 여지무늬(오른쪽), 숙신공주(淑愼公主) 무덤 출토, 조선 1650년경, 높이 4.5cm, 덕수6468

여지가 언제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14세기 중국 무역선의 화물에서 여지의 씨앗이 발견되어 이미 14세기 이전부터 중요 교역품으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여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나타납니다. 중국을 다녀와서 그 여행기를 기록한 『연행록(燕行錄)』 같은 문헌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세종8년(1426), 예종1년(1469), 연산군 4년(1498)에도 여지를 수입해 오라는 왕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 학자인 금계노인(1566~1623)이 쓴 『금계일기(錦溪日記)』에서도 ‘예로부터 이 열매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여지를 상당히 오랫동안 애호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여지의 선호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연산군 2년(1496), 중종 1년(1506), 선조 23년(1590)의 기록을 보면 여지의 잦은 수입을 경계하는 의견과 수입금지령이 자주 언급됩니다. 여지가 값비싼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주요 소비층인 상류층에 크게 어필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별한 선물, 여지금대(荔枝金帶)

여지는 일반인들은 물론 상류층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진귀한 물건으로 인식되었고, 여지무늬 허리띠는 왕이 내리는 하사품(下賜品)이나 중국의 사신이 왕에게 진상하는 선물로 자주 등장합니다.

1607년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시의 읍지 『영가지(永嘉誌)』에는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다가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가지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물품 가운데 ‘동제여지금대(銅製荔枝金帶)’ 한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후 조선 초기인 태종12년(1412)에도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고충언(高忠彦)이 제주로 내려가게 되자 태종이 여지무늬 허리띠를 하사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여지무늬 허리띠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 권153에는 허리띠에 사용한 무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여지는 어선화(御仙花) 혹은 속대(束帶)라고 하며,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982)에 삼사(三師), 절도사(節度使),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어사대부(御使大夫) 등에게 어선화대(御仙花帶)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록 중 『고려도경(高麗圖經)』 관복조(官服條)에는 종관복(從官服)으로 자문라포(紫紋羅袍)와 어선금대(御仙金帶)를 착용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종관복조(從官服條)에는 종관을 비롯하여 어사중승(御使中丞)과 특별히 왕의 은영(恩榮)을 입은 자, 왕의 세자 등이 어선금대를 착용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고급관리와 왕실과 관련된 자들이 여지무늬 허리띠를 주로 착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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