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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빚은 여인상 : 양성혁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신석기실 한편에 흙으로 된 조그마한 전시품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작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아마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작고 초라해 보이는 전시품입니다. 혹 어떤 이는 왜 이런 볼품없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지 의아해 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냥 흙덩이가 아닙니다. 머리와 팔다리는 없지만, 봉곳이 솟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 풍성한 엉덩이, 영락없이 여성의 몸매입니다. 마치 토르소(torso)를 보는 듯합니다. 대체 누가 언제 이 여인상을 만들었을까요?

사진. 흙으로 빚은 여인상

흙으로 빚은 여인상,
울산시 서생면 신암리, 1974년 발굴, 신석기시대, 길이 3.6cm

이 조그마한 ‘흙으로 빚은 여인상’은 울산광역시 서생면 신암리유적 제2지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융기문토기 중심의 신암리유적 제1지구와 달리, 제2지구는 소위 태선문토기와 함께 지두문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융기문토기가 소량 확인되었습니다. 여인상은 그 출토된 층위가 불분명한데, 융기문토기와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길이는 3.6cm입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제1지구의 중심연대를 신석기시대 조기(6,000~4,500 B.C.E.)로, 제2지구의 중심연대를 신석기시대 중기(3,500~2,500 B.C.E.)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왜 이 여인상을 만든 것일까요?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가슴, 아랫배, 엉덩이를 강조하여 아기를 임신한 여성을 표현한 조각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조각품들이 수렵채집사회에서 생식과 출산을 상징⋅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너스’라면 팔등신의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인데 가슴과 아랫배, 엉덩이를 강조한 이러한 여인상을 비너스라 하면, 비너스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보이는 아프로디테, 즉 비너스의 원래 모습을 이해한다면 왜 이 조각품들을 비너스라 일컫는지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아프로디테는 본래 대지를 다스리는 여신이자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지중해 일대에서 널리 숭배되었던 지모신(地母神)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모신 사상은 여성의 생리적 특성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듯, 대지는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는 터전이라는 점에서 신화에서는 그것을 어머니와 같은 여신, 곧 모신(母神)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고대 인류의 강렬한 염원을 담고 있는 풍만한 몸매의 여인상이야말로 비너스의 원형일 것입니다. 대체로 지모신 사상은 수렵채집사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렵채집사회에서 사냥은 주로 남성의 몫이었으며, 채집은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사냥은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 확보가 안정적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주변의 식물자원을 이용하는 채집은 비록 풍부하지는 못할지라도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빙하기가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는 신석기시대가 되면 동물자원보다 식물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대지를 숭배하는 지모신 사상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표현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사회에서도 이러한 여성 중심 혹은 여신 숭배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요령지방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우하량(牛河梁)유적에서 여신상과 신전터가 확인되었으며, 일본 조몽시대의 수많은 토우(土偶) 역시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한 여인상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그 출토 예가 많지 않으나, 울산 신암리유적⋅세죽유적, 전남 완도 여서도패총, 함북 청진 농포패총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습니다. 4점 모두 토제로 그 단면은 판상(板狀)입니다. 얼굴과 사지의 표현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일본 조몽시대 초창기∼조기의 토우의 형태와 유사합니다. 4점 중 2점은 성별을 구별할 수 없으나, 신암리와 농포의 출토품은 봉긋 솟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의 표현을 통해 한눈에 봐도 여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뿐만 아니라 돌⋅뼈⋅조개껍데기⋅나무⋅뼈 등을 재료로 하여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조형물은 모두 소형으로 그 크기가 10cm 이내로 손에 완전히 잡힐만한 크기입니다. 대체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 도식화되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크게 인체상(人體像), 인면상(人面像), 동물상(動物像)으로 구분됩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주술행위의 매개체로 보고 있습니다.

사진. 흙으로 빚은 멧돼지

흙으로 빚은 멧돼지,
경남 통영시 욕지도, 1989년 발굴, 신석기시대, 길이 4.2cm

이 조형물은 그 분포양상에 있어 공간적으로 동해안과 남해안의 유적에서만 확인될 뿐 내륙이나 중서부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 교란층이나 지표에서 수습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시간적으로는 동북지역의 서포항유적과 농포유적을 제외하고는 신석기시대 조기∼전기(기원전 6,000∼3,500)에 해당됩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조형물은 즐문토기문화보다는 융기문토기문화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출토된 조형물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 연구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풍부한 출토 예를 바탕으로 조형물의 사회적⋅문화적 역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15,000여점의 인물상이 확인된 일본 조몽문화의 경우, 초창기∼조기의 단순한 형태의 인물상이 전기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주술적 매개체인 조형물을 이용한 제사가 더욱 발전하여 다양한 토우가 제작된 것으로, 조형물의 사회적 역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화북 이남의 농경문화에서는 여인상이나 동물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북지역의 경우, 여인상과 동물상 등 다양한 조형물들이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에 걸쳐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홍산문화 이후 화북형 농경문화 유입 후 여인상과 동물상의 수가 급감하다 결국 사라집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의례행위의 변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정착적인 식료 채집민 집단은 자연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에 있어 조형물을 사용하였으나, 화북 이남의 농경사회에서는 하늘을 모시는 제사를 지냈기에 조형물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또한 홍산문화 이후 화북형 농경문화의 도입과 함께 조형물이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과 중국의 연구 사례와 비교하여, 우리나라 출토 신석기시대의 조형물을 생업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조형물은 시간적⋅공간적 분포의 특징상 수렵⋅채집⋅어로 중심의 융기문토기문화에 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렵채집집단의 주술적 매개체로, 그 사회적⋅문화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농업이라는 새로운 생계수단이 도입된 즐문토기문화단계에 들어와서는 제사형태의 변화에 따라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제 3유형: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저작권 보호분야 흙으로 빚은 여인상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3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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