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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득경 초상 : 문동수

옛 사람과의 교감

단정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선비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동파관에 평상복을 입고 술이 달린 옥색의 세조대로 허리를 동여맸습니다. 여기에 화려한 옥색의 가죽신 운혜를 신고 뒷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린 듯한 자세를 보입니다. 건장한 신체에 붉은 입술을 지녀 분명 살아있는 인물을 그린 듯하지만 사실 이 초상화는 사후에 그린 초상, 즉 유상(遺像)입니다.

동시대에 살았던 지인들이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어떤 감정이 솟아오를까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세상을 떠난 그를 실제로 만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내 만감이 교차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인의 초상화를 마주 대하는 사람은 초상화 속 인물과의 교감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감동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초상화를 전신이 잘 표현되었다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사람의 초상화를 보고 교감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비록 초상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조상이 남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될 때, 무언의 대화를 통해 교감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는 마주보는 대상에 대한 이질감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번도 마주대한 적은 없지만 동시대의 유명인사나 자신이 흠모하는 사람의 초상화를 대했을 때는 상황이 다를수밖에 없겠죠.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닮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누구다’라고 알게 되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벅찬 감동을 얻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초상화라면 감명은 배가되고, 실제로 만난 것처럼 즐거움이 더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옛 사람의 초상화를 볼 때의 감정과 우리가 살고있는 동시대 인물의 초상화를 대할 때의 감정의 스펙트럼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득경(沈得經)의 삶

심득경(1673~1710)은 1673년(현종14)에 태어났습니다. 청송(靑松)이 본관이며, 자는 사상(士常)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심주(沈柱)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습니다. 그는 원래 판중추부사, 판의금부사, 도총관 등을 역임한 생부인 심단(沈檀)의 둘째아들이었으나 큰아버지인 심주에게 자식이 없자 양자로 가게 되었습니다.

심단은 해남 백련동에서 출생하여 윤선도에게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윤선도의 외손인 윤두서(1668~1715)와 심단의 둘째 아들인 심득경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습니다. 심득경의 형인 심득천(沈得天) 역시 1687년(숙종13)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였습니다.

심득경의 어머니는 윤선도의 큰 딸이었기 때문에 심득경과 윤두서는 내종숙질 사이였습니다.

심득경은 윤두서보다 다섯살 아래였지만 21세가 되던 해인 1693년(숙종19)에 윤두서와 함께 식년시(式年試)에 응하였습니다. 당시 과거시험 결과를 기록한 『계유식년 사마방목(癸酉式年司馬榜目)』 에 의하면 과거에 응시한 100명 가운데 심득경이 3등(三等)에 합격하여, 30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는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공재 윤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처지였던 두 사람은 서로 벗하면서 늘 시문을 읊는 초야의 짝이 되었습니다.

소식(蘇軾, 1037~1101)을 흠모한 화가 윤두서

사진. 윤두서, <소동파 초상>, 《윤씨가보》

윤두서, <소동파 초상>, 《윤씨가보》, 종이에 먹, 22.4 × 14.2㎝, 해남 녹우당

윤두서는 평소에 공자, 맹자와 같은 중국의 역대 성현들을 존숭하여 『삼재도회(三才圖會)』 나 각종 문집에 수록된 성현들의 모습을 수집하여 직접 그려보았습니다. 주자나 소식 등 송대 유학자나 문장가들을 좋아하여 그들의 삶을 생활의 본보기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그는 북송대 소식을 무척 흠모하였습니다. 문인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당송팔대가인데다 유학과 도학에도 밝은 소식의 삶이 자신과 닮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식이 역설한 「전신론(傳神論)」 역시 윤두서가 대상을 제대로 관찰하여 그리는 법을 깨닫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론이었습니다.

전신과 관찰은 같은 원리이다. 사람의 천진한 모습을 얻으려면 방법은 당연히 여러 사람 중에서 관찰해야만 한다. 지금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의관을 모두 갖추고 앉아 한 가지 사물을 주시하게 하여 용모를 단정히 하도록 한다면 어찌 천진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소식의 「전신론」 은 이미 정해진 부자연스러운 상태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의 초상화를 그려야 정신을 제대로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소식이 이처럼 ‘정신’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은 대개 사람의 모습은 변하지만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자연스럽지 않으면 인물의 개성이나 특색을 그려내기 어렵다고 여긴 것입니다.

윤두서가 소식을 흠모한 흔적은 그의 저서인 『기졸(記拙)』 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소식의 <묵죽도>에 대해 화평을 남겼고, 『윤씨가보』 에는 그가 직접 그린 소식의 초상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학창의에 동파건을 쓴 <동파진(東坡眞)>이 그것인데, 글을 지으려는 일상생활 속의 문장가다운 기품을 풍겨주는 초상입니다. 윤두서는 평소에 가장 흠모한 지기(知己)인 심득경에게 소식의 학자다운 모습을 오버랩시켜 나타냈습니다. 손아래 친구였지만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심득경을 위해서 윤두서는 초상화를 직접 그리게 되었고, 이후 넉달만에 완성하게 됩니다.

심득경 초상의 분석

사진. 윤두서, <심득경 초상>

윤두서, <심득경 초상>, 1710년, 비단에 색, 160.3 × 87.7㎝, 보물 148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득경의 초상은 세 개의 비단폭을 하나로 잇대 그렸는데, 비단의 크기가 세로 160.3cm, 가로 87.7cm입니다. 윤두서는 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이목구비 뿐만 아니라 신장까지도 세심하게 고려하였습니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1cm였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심득경의 앉은 키가 133~134cm 정도임을 감안하면 실제의 키는 161cm 보다 약간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초상화 속에 놓인 의자는 높은 편이지만 무엇보다도 윤두서가 실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 심득경의 신장까지도 고려하여 그린 세심함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화면 상단에는 ‘정재처사심공진(定齋處士沈公眞)’이라는 예서체의 제목이 있습니다. 정재는 그의 호이며, 처사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지칭합니다. 동파관에 편복(便服) 차림을 한 채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의자에 공수자세로 단정하게 앉아있는 심득경은 처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심득경은 1710년 8월 21일 38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윤두서가 단순히 그를 연상하며 그린 게 아니라는 점은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11월에 그림을 완성하여 심득경의 집으로 보냈는데, 당시의 상황은 남태응(南泰膺)이 쓴 『청죽화사(聽竹畵史)』 에 생생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초상화가 터럭하나 틀리지 않아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고, 마치 손숙오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잃은 연민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는 의롭고 영민한 초나라의 재상에 비유한 것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벗인 이서(1662~?)는 심득경의 외모와 성정을 두 편의 찬시로서 담담히 묘사하였습니다.

단아하고 빼어난 골격, 담담하고 맑은 기질, 마음과 정신이 순수하여 옥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갑다. 어질고 겸손하며 공정하고 밝다. 얼굴은 반듯하며 길고, 얼굴빛은 밝고 향기롭다. 눈은 해맑고 코는 곧으며 입술은 붉고 치아는 가지런하다. 귀는 시원하고 귀밑머리는 성글며, 눈썹은 단아하고 수염은 청결하다. 거동은 바르고 공손하며, 목소리는 청아하고 윤택이 난다. 의젓한 모습의 초상화여, 완연히 살아 있어 직접 보는 것 같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나, 오호라. 그대의 이 용모를 보지 않고 누가 그대의 성격과 마음씨를 알 것이며, 그대의 이 마음씨를 보지 않고 누가 그대의 덕성을 알 것인가.
形端骨秀, 質淡氣淨, 心純神粹, 玉潔氷㓏. 仁厚謙愼, 公直光明. 面方而脩, 色晢而馨. 目淡鼻端, 唇赤齒精. 耳凉鬢疎, 眉端鬚淸. 端恭其儀, 淸汗其聲. 遺像儼然, 宛如其生, 彷彿其見, 怳惚其聽. 嗚呼, 匪子之氣像, 孰知子之德之誠.

이서는 윤두서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어려운 심득경의 기질과 품성을 보완이라도 하듯 또 다른 찬시를 덧붙였습니다.

물위에 뜬 달 같이 깨끗한 그 마음, 얼음같이 차고 맑은 그 덕성, 묻기를 좋아하고 힘써 실천하여 그 얻음을 확고히 했네. 그대가 나를 떠나가니 도(道)를 잃어버린 지극한 슬픔.
水月其心, 氷玉其德, 好問力踐, 確乎其得. 惟子之吾, 喪道之極.

윤두서는 이미 떠나고 없는 심득경을 향한 그리움과 추모하는 마음을 엄숙하게 가다듬어 그렸음을 밝힙니다.

숙종 36년인 경인년(1710) 11월에 그렸는데, 당시는 심득경공이 숨을 거둔 지 4개월이 되었다. 해남의 윤두서가 삼가 재계하고 마음으로 그리다.
維王三十六年庚寅十一月寫, 時公歿後第四月也. 海南尹斗緖謹齋心寫.

또 윤두서의 둘째형인 윤흥서가 1717년 심득경을 위해 쓴 묘지에서는

심득경은 몸가짐이 아름답고, 마음에 품은 바가 고요하고 욕심이 없다. 허물이 없기가 가을 달이 차가운 연못에 비추는 듯하고, 연꽃이 진흙 속에 피어나지만 향기롭고 더러움에 들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심득경이 향기로움과 깨끗함을 지닌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앞의 찬문을 보더라도 윤두서는 직관적 통찰력이 뛰어난 문인화가임을 드러냅니다. 그가 심득경 초상을 그릴 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벗에게 내재한 고유한 성정과 보편적인 특징을 포착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착안하여 형상을 재현함으로써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실재 인물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고, 큰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심득경 초상은 그리는 화가와 대상 간에 어떠한 교감이나 소통이 있을 때에 득의하게 된다는 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좋은 초상화를 결정짓는 관건은 가시적인 형상, 즉 외형적인 닮음도 중요하지만 대상의 내적 본질이나 정신적 세계를 잘 투영시켜 재현한 데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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