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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그릇받침(기대) : 강원표

사진. 그릇받침

그릇받침, 경기도 포천 자작리 2호주거지, 백제, 5세기, 토제, 높이 44.6cm

그릇받침은 바닥이 둥근 그릇을 받쳐두기 위해 만든 것으로, 둥근바닥 토기가 많이 만들어졌던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토기를 고정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제사에 사용하기 위한 공헌용(貢獻用) 도구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크기는 더욱 커지고, 갖가지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매우 아름다운 토기로 발전하였습니다.

삼국시대 그릇받침 중 가야와 신라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백제는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매우 적습니다. 포천 자작리 출토 그릇받침은 백제 그릇받침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자료입니다.

삼국시대 그릇받침

우리나라에서 그릇받침을 쓰기 시작한 것은 둥근바닥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삼한 이후로 추정됩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고정쇄기, 혹은 받침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다른 토기(혹은 아가리 등의 일부분)를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발전하여 그릇을 받치기 위한 용도만으로 사용하기 위한 토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 사진. 토기와 받침

    토기와 받침, 평양 정백리 127호묘, 낙랑
  • 사진. 토기와 받침

    토기와 받침, 진천 석장리유적, 백제
  • 사진. 그릇받침의 받침부분 구멍

    그릇받침의 받침부분 구멍

그릇받침은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둥근바닥 항아리가 크게 유행하였던 삼한과 백제, 신라, 가야에서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가야와 신라에서는 대형고분이 축조되는 5세기대부터 화려하게 장식된 그릇받침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유행은 그릇받침의 용도가 변화한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처음에 일상용으로 제작되었던 그릇받침이 점차 제사를 위한 공헌용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이 시기의 대형 고분에 화려한 그릇받침들이 많이 부장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에서 그릇받침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것은 토기제작의 전통과 관련되거나 제사 문화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릇받침은 그릇을 얹어두는 받침부분[수발부(受鉢部)]과 이를 지탱하는 다리부분[대각부(臺脚部)]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 몸통부분[신부(身部)]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굽다리 접시를 크게 확대한 바리모양 그릇받침[발형기대(鉢形器臺)], 몸통부분이 화로와 비슷한 화로모양 그릇받침[노형기대(爐形器臺)], 몸통부분이 긴 원통과 같은 원통모양 그릇받침[통형기대(筒形器臺)]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바리모양이나 화로모양 그릇받침은 토기를 올려놓지 않아도 다른 물질이나 물건을 담아 놓을 수 있지만,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그릇받침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특히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일상생활에 부적합할 정도의 높이 솟은 형태와 비실용성, 화려한 장식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릇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보통 대형 무덤이나 제사유적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의례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릇받침은 일상용 토기에 비해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사용한 지역정치집단의 차이를 매우 잘 반영한다고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정치집단의 구분과 이동에 유용한 연구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한 정치집단의 고유 형태로 확립된 그릇받침은 하나의 정치권역 및 정치집단 상호간의 교류관계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인 것입니다. 또한 제사와 같은 특수용도로 사용된 토기이기 때문에 상례(喪禮)와 의례(祭禮)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 사진. 바리모양 그릇받침

    바리모양 그릇받침,
    공주 수촌리 2-4호분, 백제, 5세기
  • 사진. 화로모양 그릇받침 출토모습

    화로모양 그릇받침 출토모습,
    고령 쾌빈동 12호분, 가야, 5세기
  • 사진. 원통모양 그릇받침

    원통모양 그릇받침,
    성주 성산동 38-2호분, 가야, 5세기
포천 자작리 출포 원통모양 그릇받침

경기도 포천군 자작리(抱川郡 自作理)에서 발견된 그릇받침은 백제 주거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포천 자작리 유적은 2001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조사한 백제의 마을 유적으로 4개의 6각형 백제 주거지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릇받침이 출토된 2호 주거지는 출입구를 포함한 남북길이 23.78m, 폭 13.35m, 면적 191.1㎡로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주거지 중 최대의 것입니다. 그릇받침은 이 주거지의 입구 부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백제의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그 전체 형태가 복원되는 예가 매우 드물어 현재까지 모두 4점 정도에 불과합니다. 포천 자작리 출토 그릇받침은 한성기 백제 원통모양 그릇받침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면서, 자작리 유적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그릇이 얹어지는 받침 아래에 긴 몸통을 갖춘 전형적인 원통모양 그릇받침으로 높이 44.6cm, 아가리 지름 21.7cm, 받침지름 27.8cm로 백제 토기 중에는 비교적 대형에 속합니다. 몸통에는 단면 삼각형의 덧띠[돌대(突帶)]가 2개씩 짝을 지어 3줄 돌아가고, 그 위아래에 삼각형의 투창(透窓)을 뚫었습니다. 4개의 투창이 4열을 이루고 있고, 몸통과 명확히 구분되고 있는 받침 부분에도 6개의 투창으로 장식하는 등 총 22개의 창을 뚫었습니다.

사진. 포천 자작리 2호 주거지(아래쪽이 입구부분) 포천 자작리 2호 주거지(아래쪽이 입구부분)

사진. 그릇받침 발굴상황 그릇받침 발굴상황

백제의 그릇받침

백제의 그릇받침 중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가야나 신라에 비해 그 수량이 매우 적은 편입니다. 또한 무덤에서 부장되는 예가 거의 없고 대부분 마을유적이나 제사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어 파손이 매우 심합니다. 한성기 백제의 중심지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부안 죽막동 유적과 같은 제사유적에서도 많은 수가 확인되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무덤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연기군 송원리 16호분의 무덤 입구에서 확인된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무덤의 입구에서 치러진 제사의 흔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포천 자작리 출토 그릇받침은 투창과 덧띠로만 장식되어 있지만, 백제 그릇받침은 다양한 모양의 투창, 화려한 새김무늬, 독특한 형태의 부가장식이 부착되는 등 복합적인 장식문양이 특징입니다. 투창의 형태도 원형, 사각형, 삼각형을 비롯하여 하트모양까지 살펴집니다. 새김무늬는 물결무늬, 격자무늬, 톱니무늬[거치문(鋸齒紋)], 점열(點列)무늬 등 백제토기에 보이는 모든 무늬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른 토기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단면 삼각형과 사각형의 덧띠가 돌려지기도 하고, 고사리, 개구리, 단추, 방울 모양 등 장식을 흙으로 빚어 부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식은 무늬가 거의 없는 여타의 백제 토기와 비교해 매우 독특한 점입니다. 일반적인 백제 토기의 경우 무늬가 없거나, 노끈이 감겨진 나무판을 이용해 새긴 두드림 무늬[타날문(打捺紋)]가 대부분이고, 여기에 간단한 선, 혹은 물결무늬 정도가 추가됩니다. 이에 비해 그릇받침의 경우 백제 토기에 사용된 모든 문양기법은 물론, 다채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의 토기 장식 기술의 정점이 원통모양 그릇받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진. 그릇받침의 문양과 장식

그릇받침의 문양과 장식, 각지출토, 백제, 5~7세기

백제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한성기인 4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주로 서울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파편을 통해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원통모양 그릇받침들은 대부분 투창과 새김무늬로 장식되고 있으며, 그 형태는 포천 자작리 출토 그릇받침과 같이 받침부분, 몸통부분, 다리부분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습니다.

도읍을 공주로 옮긴 웅진기에는 앞 시기에 비해서 다리부분이 점차 확대되며, 토기를 빚어 만든 장식이 많이 부착되게 됩니다. 또한 투창이 비중이 매우 커지기도 하는 등 장식성이 크게 높아집니다. 무령왕릉이 자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과 그 주변의 제사터 등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백제가 다시 도읍을 부여로 옮긴 사비기에는 다리부분이 더욱 발달하여 몸통이 크게 축소됩니다. 몸통부분과 다리부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특별한 구분선 없이 유려한 곡선으로 연결됩니다. 이 시기의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마치 장고를 반으로 잘라놓은 것과 같다 하여‘장고형 그릇받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장식성을 대폭 줄여 매우 산뜻한 형태의 그릇받침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유약을 발라 도자기와 같은 효과를 낸 그릇받침도 발견됩니다.

백제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한성기에 출현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적, 예술적인 발전 요소들이 반영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발견된 대부분의 그릇받침들이 파편들이기 때문에 세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포천 자작리 출토 그릇받침과 같이 완전한 형태의 자료들이 더 발견되면 백제 그릇받침의 형태와 변화양상, 출현시기와 기원문제, 신라ㆍ가야 그릇받침과의 영향관계 등이 좀 더 명확하게 규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진. 시유된 그릇받침 조각

    시유된 그릇받침 조각,
    부여 능산리, 백제, 7세기
  • 사진. 그릇받침

    그릇받침,
    서울 몽촌토성, 백제, 5세기
  • 사진. 그릇받침

    그릇받침,
    공주 송산리, 백제, 6세기
  • 사진. 그릇받침

    그릇받침,
    부여 신리, 백제, 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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