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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 이진민

1971년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씨는 배수로 작업 도중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이상한 물건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구재천씨는 이 금속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넘겼고 수많은 고물들을 봐왔던 엿장수는 고심 끝에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에 신고하였습니다. 신고가 접수된 지 4개월 후, 청동유물이 발견된 화순 대곡리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유구가 일부 파괴된 상태였지만 이단으로 묘광을 파고 통나무 목관을 놓은 후 깬 돌로 채웠음이 밝혀졌습니다.

사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초기철기시대, 지름(동경大) 18 cm, 국보 143호
37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화순 대곡리 청동유물

놀라운 것은 이 유적에서 총 11점의 청동유물들이 일괄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식동검 3점, 청동도끼 1점, 청동새기개 1점뿐만 아니라 정교함의 극치인 잔무늬거울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이 출토되어 이듬해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2008년 2월, 폐가로 변한 현장의 정비를 위해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화순 대곡리 유적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37년 전에는 긴급 수습 조사의 성격이었기에 목관 밑 등 정밀하게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었던 것입니다. 조사를 마무리할 때쯤 남쪽 바닥에서 한국식동검 2점이 추가로 발견되어 37년 만에 이 무덤의 모든 부장품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총 13점이 된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들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 선사문화실에서 전시 중입니다.

지배자의 상징, 한국식동검

화순 대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유물들은 한국식동검문화를 대표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크게 요령식동검이 만들어진 시기와 한국식동검이 만들어진 시기의 문화로 나누어집니다. 한국식동검문화는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청천강 이남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청동기문화로 청동기시대 후기 또는 이 시기부터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초기철기시대라고도 합니다. 대표적인 청동유물로는 날이 직선인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투겁창, 꺾창과 같은 무기류와 잔무늬거울, 각종 방울류 등 의기류가 있습니다.

화순 대곡리 유적에서는 길이가 다른 총 3점의 한국식동검이 출토되었습니다. 자루 부분은 모두 발견되지 않아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한국식동검은 요령식동검과 마찬가지로 검몸과 자루를 따로 만들었으나 직선의 날을 지니며 오목하게 들어간 어임 부분[抉入部]과 마디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요령식이건 한국식이건 동검은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지배자의 상징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검 자체가 가진 상징성은 동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대형 석검이나 자루가 과장된 석검, 고인돌에 그려진 그림 등을 통해 석검 역시 당시 사람들에겐 과시할 수 있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물건이자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여수 오림동 고인돌의 덮개돌을 보면 석검이 굉장히 크게 표현되어 있고 그 옆에 작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비는 듯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사진. 여수 오림동 고인돌 덮개돌에 새겨져 있는 그림. 중앙에 석검이 크게 그려져 있고 주변인들이 무릎을 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석검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수 오림동 고인돌 덮개돌에 새겨져 있는 그림. 중앙에 석검이 크게 그려져 있고 주변인들이 무릎을 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석검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석검은 수렵 등 실생활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령식동검이 귀하던 시기 동검과 더불어 지배자를 상징하는 의미 역시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석검은 요령식동검에 이어 한국식동검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사라집니다. 요령식동검과 석검이 지녔던 상징성을 한국식동검이 오롯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검은 등장 이래 찌르고 베는 그야말로 ‘칼’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 제작 기술의 정점, 잔무늬거울

한국식동검문화단계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청동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수적으로 풍부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청동기 제작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물이 잔무늬거울입니다. 잔무늬거울은 거친무늬거울[粗文鏡]에서 발전하여 더욱 세밀해진 것으로 거울 뒷면에는 두 개의 꼭지[鈕] 달려 있고 전면에 걸쳐 직선을 이용한 기하학적인 문양이 베풀어져 있습니다. 화순 대곡리에서 출토된 2점의 잔무늬거울 크기는 각각 18cm(①), 15.6cm(②)로 크게 바깥쪽부분, 가운데부분, 안쪽부분으로 나누어져 다른 문양 조합이 베풀어져 있습니다.

사진. 화순 대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2개의 잔무늬 거울. 기하학적 무늬가 돋보이는 잔무늬 거울은 청동기 제작 기술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유물입니다.

화순 대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2개의 잔무늬 거울. 기하학적 무늬가 돋보이는 잔무늬 거울은 청동기 제작 기술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유물입니다.

사진. 국보 1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잔무늬거울 도면, 2007~2008년에 진행된 거울의 보존처리를 통해 잔무늬거울 제작과 관련된 많은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국보 1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잔무늬거울 도면, 2007~2008년에 진행된 거울의 보존처리를 통해 잔무늬거울 제작과 관련된 많은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1mm 폭 안에 2~3개의 가는 선으로 채워진 삼각 집선무늬[集線文]가 주된 문양 요소지만 ①처럼 동심원문이 베풀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심원문은 국보 제141호 잔무늬거울, 당진 소소리 유적 출토 잔무늬거울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거울의 바깥쪽부분을 보면 삼각 집선무늬가 마치 햇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태양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친무늬거울의 경우 거푸집이 남아있는데 반해 잔무늬거울의 거푸집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가 없습니다. 또한 잔무늬거울의 문양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여 현대 과학으로도 복원에 실패하는 등 그간 제작 기법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2007~08년에 걸쳐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141호 잔무늬거울에 대한 보존처리가 이루어지면서 거울 제작과 관련된 많은 궁금증들이 풀렸습니다. 분석을 통해 대부분의 거푸집이 활석제로 만든 것과는 달리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잔무늬거울의 경우 주물사(가는 모래)로 만든 거푸집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검과 거울, 누가 어떻게 사용하였나?

청동기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은 ‘어떻게’ 만들었고 ‘누구’에 의해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었는가 일 것입니다. 청동기는 기본적으로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들며 재질의 개선을 위해 납, 아연 등을 첨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금속을 얻기 위해 광석의 채취가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청동제품은 각 광석을 녹여 얻은 용액들을 제품의 용도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섞은 후 거푸집에 부어 만듭니다. 거푸집에서 찍어낸 청동제품은 마지막으로 숫돌을 이용해 가장자리를 다듬거나 날을 세우거나 모양을 내어 마무리합니다. 청동제품을 만드는 데에는 이처럼 까다롭고 세심한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식동검이나 잔무늬거울은 대부분 무덤에서 옥, 토기 등 다양한 껴묻거리와 함께 출토됩니다. 화순 대곡리 유적은 묘광을 이단으로 깊숙이 파고 목관 위를 돌로 채운 돌무지널무덤입니다.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함평 초포리 등 한국식동검문화단계의 청동유물이 다량 발견된 유적을 보면 하나같이 돌무지널무덤의 형태입니다. 이전 시기에 유행했던 고인돌이 지배자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집단’의 기념물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면 돌무지널무덤은 매장될 ‘한 사람’을 위해 깊은 묘광을 파고 최고 수준의 청동기를 다량 넣었다는 점에서 보다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검과 거울은 이러한 강력한 지배자가 살아생전 사용하였던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식동검은 요령식과는 달리 검몸의 폭이 좁고 날카롭게 직선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구리가 70~80%로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어 단순히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써만이 아니라 지배자가 실제로 사용하였던 무기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잔무늬거울은 방울 등의 의기류와 더불어 주석의 함유량이 동검에 비해 많습니다. 이는 빛의 반사나 맑은 소리를 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청동거울은 얼굴을 비추는 미용적인 목적보다는 태양빛을 반사하는 기능을 가진 의기로 종교적, 주술적 의례 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정일치의 사회를 의미하는 검과 거울

지배자의 무덤 속에서 꺼내진 검과 거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검은 지배자로서의 정치적인 권위를, 거울은 제사장으로서의 의례적인 권위를 나타냅니다. 즉, 신을 받드는 제사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는 제정일치의 사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고 대규모 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정착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집단 내뿐만 아니라 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해주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 줄, 생업의 커다란 변수인 자연에 대해 풍요와 안녕을 바라는 의식을 거행해 줄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강력한 지배자가 점차 필요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한에서 이렇게 강력한 지배자가 가장 먼저 출현하는 지역은 어디일까요?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화순 대곡리 유적입니다. 화순 대곡리를 포함한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경우 청동무기와 의기류 등 한국식동검문화단계의 유물들이 이른 시기부터 풍부하게 발견됩니다. 즉, 위계화가 상당히 진행된 정치집단이 출현하여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저작권 보호분야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3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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