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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지도, 정상기 : 장상훈

지도는 자기 자신을 직접 그린 자화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도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뿌리내려 살아 온 고장의 산줄기와 물줄기, 그들이 일구어 만든 고을과 마을이 그들 나름의 시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 지도를 통해서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선인들이 만든 지도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습니다. 옛 지도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사자료인 것입니다.

<동국대지도> 일부, 정상기, 조선 1755~1767, 272.0 x 147.0 cm, 보물 1538호
<대동여지도>의 탄생에 밑거름이 된 지도

보물 1538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는 18세기 중엽 정상기(1678~1752)가 제작한 우리나라 전국지도의 사본으로, 그가 제작한 ‘동국대지도’에 가장 가까운 지도입니다. 오늘날 정상기가 만든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지도는 그의 지도를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동국’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별칭 중 대표적인 것이고, ‘대지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크기가 가로 147cm, 세로 272cm에 달하는 큰 지도입니다.

<동국대지도>는 이전 시기의 지도를 일신한 새로운 지도였고, 동시에 이후 우리나라 전통지도의 결정판인 <대동여지도>의 탄생에 밑거름이 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우수한 지도가 나오기까지는 누대에 걸친 지도 제작 전통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동국대지도>는 전통 지도의 발전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던 지도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심지어 <대동여지도>를 능가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8세기 후엽에 20리 방안에 기반한 대축척 고을지도를 제작한 신경준은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로 정상기의 지도를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신경준의 지도는 이후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 제작의 핵심 자료가 되었습니다.

정상기는 김정호에 비하면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조선 후기의 지도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은거하면서 실학 연구에 몰두했고, 그의 저술은 정치·경제국방·군사전략·의약·농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아들 정항령 등 증손자까지도 지도를 제작했지만, 관직에 나갔던 정항령을 빼고 나면 그들의 행적에 대해 남은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정상기가 만든 지도가 주목을 받는 것은 1752년 그가 죽고 난 뒤였습니다. 1757년 영조는 당시 하급관리였던 정항령의 집에 좋은 지도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조정에 들여와 지도를 살펴보니 산줄기와 물줄기, 도로의 표현이 매우 상세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영조는 <동국대지도>라는 이름의 지도를 홍문관에 보내 모사하도록 하고, 며칠 뒤 <동국지도> 지도첩도 같은 과정을 통해 입수해서 복제하고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조는 70평생에 이런 지도를 들어본 일이 없다면서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도 지도 측량의 오류를 거의 없앴다는 다소 과장이 섞인 평가를 하였습니다.

‘동국’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별칭 중 대표적인 것이고, ‘대지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크기가 가로 147cm, 세로 272cm에 달하는 큰 지도입니다.
북부지방의 지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다

조선전기의 지도는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개창과 함께 지도 제작과 지리지 편찬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전기인 15세기에 정척이 만든 <동국지도>라는 전국지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상세한 지도였습니다. 전국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상세하게 표현되었고, 이 위에 조선시대의 각급 행정단위 즉 부·목·군·현 330여 개가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더해 병영과 수영 등 군사시설의 위치도 상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의 영향력은 대단히 큰 것이어서 16세기까지 유행했고,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척이 직접 만든 지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16세기(1557~1558경)에 제작된 국보 248호 <조선방역지도>가 그 모습을 잘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척 유형의 지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북부지방의 표현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물줄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서 일직선에 가까운 평평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동국대지도>가 정척 유형의 지도와 다른 가장 큰 차이이자 가장 중대한 개선사항은 이러한 북부지방의 표현을 극적으로 개선했다는 것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물줄기를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지형이 정확해졌고, 비로소 국토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 뒤에는 북방지역의 방어에 대한 고민이 깊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16세기 초 청나라가 등장해서 명나라를 꺾고 중원을 장악하였습니다. 청나라가 일으킨 두 차례의 호란으로 고난을 겪은 조선은 북벌을 벼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청나라와의 전쟁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북방지역을 보다 주의 깊게 살피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당시 조선 사람들은 청나라가 오랑캐이니만큼 왕조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멸망해서 그들의 본거지인 만주지역으로 쫓겨 갈 때, 조선의 북방지역을 통과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상당히 컸습니다. 이런 인식은 18세기 중엽까지도 지속되었고, 북방지역의 군비를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또한 북방지역의 지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에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축척을 활용하여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를 추구하다

정상기는 일부 지역에만 축척을 적용했던 이전 지도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정한 비율의 축척을 국토의 모든 곳에 일관되게 적용하였습니다.

<동국대지도>가 한국의 지도 발달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바로 축척을 본격적으로 활용해 만든 전국지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전의 지도에서도 축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국 모든 지역을 일정한 비율의 축척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상기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일정한 비율의 축척을 국토의 모든 곳에 일관되게 적용하여 지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더욱이 <동국대지도>처럼 대형의 지도를 만든다고 하면 축척의 중요성은 더욱 큰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축척이 지도 위에 막대 모양으로 직접 표현되기에 이릅니다. 비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국대지도>에는 축척이 그려져 있던 부분이 결실되어 있지만, 애초에 축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동국대지도>의 초본 즉, 밑그림에 해당하는 지도에는 함경도의 동쪽 바다 쪽에 막대 모양의 축척이 분명히 그려져 있어서, <동국대지도>에도 축척이 그려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 지도첩에는 백리척(百里尺)이라고 하는 축척이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첩은 사실 <동국대지도> 보다 훨씬 대중적인 영향력이 컸던 지도입니다. 전국 8도의 도별도와 작은 축척의 조선전도를 합쳐 만든 지도로, 18세기 중엽부터 거의 19세기 말까지 인기를 누렸습니다. 결국 축척을 보면서 지도상의 지점과 지점의 실제 거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동국대지도>에서 돋보이는 것 중 하나는 이 지도가 전통적인 산줄기 체계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통시대에 산줄기와 물줄기는 단순한 자연지형 이상의 의미를 띠었습니다.

산과 강은 땅의 내부 에너지를 분배하는 일종의 도관(導管),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파이프로 간주되었습니다. 땅의 힘은 자연적인 또는 환경적인 조건과 음양 이론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위협적인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로운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소가 바로 명당이었습니다. 백두산은 이러한 산줄기 체계의 중심이었습니다. <동국대지도>와 조선 후기의 대부분의 지도에는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과 지리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중요한 산줄기 그러니까 정맥의 모습도 특별히 강조해서 표현했습니다. 군소 산줄기와는 달리 산봉우리의 크기도 크게 표현하고 짙은 녹색을 써서 도드라지게 묘사했습니다. 특히 군사적으로 중요한 6개의 정맥(청북·해서·낙남 등)을 강조해서 그렸습니다. 이러한 회화적 기법은 우리나라 전통 지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기호를 활용하여 읽기 쉬운 지도를 모색하다

<동국대지도>는 다양한 기호를 사용하여 2,200여개에 달하는 지명을 쉽고 빠르게 이해하도록 하였습니다.

<동국대지도>에는 모두 2,200여개의 지명이 실려 있습니다. 이중 자연 지명이 1,200여개이고 인문지명이 1,000여개입니다. 자연지명에서는 산지의 지명이 압도적입니다. 특히 고개의 지명이 상세하게 실려 있어서 교통로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인문 요소의 표현 중에서도 도로의 표현이 상세하며, 도로의 중요도가 붉은 색으로 채색된 실선의 굵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문지명 중에는 역시 고을이 이름이 330여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오늘날의 군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병영과 수영 등의 군영, 진과 보 같은 군사기지, 산성 등 군사 관련의 지명으로 250여개에 이릅니다.

<동국대지도>에는 다양한 기호가 사용되어, 2,200여개에 달하는 지명을 쉽고 빠르게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에서 다양한 기호를 활용하는 것처럼, 정상기는 이전 지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다양한 기호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전에도 기호가 활용되기는 했지만 그에 이르러서 아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각종 감영, 병영, 수영, 찰방역, 진보, 산성, 봉수, 고개길 등을 특정한 기호로 표현해서, 한눈에 그곳이 일정한 성격의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호에도 회화적 기법이 반영되어서 고개나 봉수, 산성 같은 경우에는 기호 자체가 바로 그 그림과 같은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또한 성곽이 설치된 고을에는 고을을 나타내는 테두리에 성곽의 모양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한편 지명의 수효와 비율은 <동국대지도>가 어떤 목적에서 제작된 것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단서가 됩니다. 즉, 행정과 국방이라는 두 개의 뚜렷한 목적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전통시대에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나라를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에서 또 중요한 것이 도로 등 교통 정보였습니다. 한국의 지도학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서 등장하여 발전해 왔습니다. 한국의 옛 지도들이 특정한 모습이나 특성을 띠게 된 것은 제작 당시의 기술이나 관념, 사회, 경제적인 여건에 연동된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는 다른 지도를 만들고 활용한 것은 지도라는 보편적인 매체에 한국의 특수성이 가미되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옛 지도의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일은 단지 지도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 전체를 살피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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