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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기관첩, 강세황 : 민길홍

사진. 《영대기관첩》 제목

《영대기관첩》 제목, 강세황, 조선 1784년, 종이에 먹, 23.3 × 54.8 cm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500여 회에 걸쳐 중국에 파견

조선시대에 국경을 건너 타국 땅을 밟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행(使行)은 타문화를 접하는 공식적인 통로로 거의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 사행단의 규모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역관(譯官), 의관(醫官), 화원(畫員) 등 정관(正官) 30여 명을 포함하여 3백 명 내외에 이르렀다고 하며,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500여 회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수백 명이 함께 중국으로 출발해서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조선에 돌아오기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리는 대장정의 길이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천자(天子)에게 조공 간다는 의미를 담아 ‘조천(朝天)’이라 하였고, 청나라 때는 연경(북경을 말함)에 가는 일이라 하여 ‘연행(燕行)’이라 하였습니다. 조천과 연행 모두 ‘중국 사행’을 뜻하는 말이지만, 연행에는 조공관계를 생략하고 좀 더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자 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것은 같지만, 시대에 따라 가는 길도 변하고, 가는 목적과 다짐도 달랐습니다. 중국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육지를 피해 바닷길로 가기도 하였으며, 조난의 사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던 바닷길 사행은 조선 사대부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사행을 안갈까 고민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반면,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볼거리를 통해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발전적인 기회로 삼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가는 길도 달라지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던 이 다이나믹한 사행의 중심에는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사행단에 속했던 화가들은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직접 접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사행의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고된 여정의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배를 타고 갔던 바닷길 사행, 중국 땅에 도착하여 접한 이국적인 풍경들, 문헌기록을 통해 듣기만 했던 중국의 역사유적지 등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을 우리는 화가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 간접 경험하게 됩니다.

강세황, 오랜 소원이던 중국 사행의 꿈을 이루다

그 누구보다 사행을 간절히 염원하던 18세기 사대부가 있었습니다. 바로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입니다. 그는 시서화에 능하여 조선의 화가들에게 스승이자 비평가였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스스로 시를 짓는 시인이었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자 글을 쓰는 명필가였습니다. 강세황은 초야에 묻혀 시서화로 예술가적 삶을 살아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61세에 관직생활을 비로소 시작하게 되는데, 66세가 되었던 1778년,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된 박제가(朴齊家, 1750~?)에게 부러움과 한탄이 섞인 편지를 써서 줍니다. 그 안에는 이런 말을 담았습니다.

“중국에 출생하지 못한 것이 한이며,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놓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어떻게 날개가 돋힐 수가 있을까.”

66세가 되도록 강세황은 중국 한번 가보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직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6년 뒤, 72세가 된 1784년 10월, 강세황은 드디어 정사(正使) 이휘지(李徽之, 1715~1785), 서장관(書狀官) 이태영(李泰永, 1744~1803)과 함께 진하사은 겸 동지사행(進賀謝恩兼冬至使行)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사행을 떠나게 됩니다. 청 건륭제가 50년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린 것을 하례하고 칙령으로 조선 사신을 1785년 1월 6일에 열리게 되는 천수연(千叟宴)에 참석시킨 것, 그리고 중국에 표류한 조선인을 돌려보낸 것에 대한 사례를 위해서였습니다. 이 때 강세황은 건륭 황제를 가까이서 보고 황제의 창백한 안색과 기침을 하는 건강상태 등을 글로 적었습니다. 사행 일정 중에 만난 중국 청나라 관리 서재 박명(博明), 낭중 화림(和林), 예부상서 덕보(德保) 등과는 시를 짓고 차운(次韻)하며 서로 교류하였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강세황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고 모여들었으며, 그 중 옹방강(翁方綱)은 그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뛰어난 재주가 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에 1809년~1810년에 사행을 다녀온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인연을 맺게 되는 담계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그에 앞서 1778년 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만난 일이 있으며, 1784년에는 강세황을 만나 그의 글씨를 접하고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작품

강세황 일행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길에 접한 아름다운 경치를 화폭에 담고, 글로 같이 읊어 시화첩을 제작하였습니다. 사로(사행길)에서 만난 기이한 세가지 경치를 담은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과 북경 호수에서 펼쳐진 빙희(氷戱: 얼음 위에서 펼치는 묘기)를 그린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은 삼사(이휘지, 강세황, 이태영)가 함께 그림과 시로 사행의 경험을 담은 시화첩으로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 두 화첩에는 공통된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기(奇)’입니다. 눈앞에서 목도하는 신기한 장면을 채택하여 그림으로 그렸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압권은 <영대빙희(瀛臺氷戱)>입니다. 청나라 건륭제의 초청으로 천수연에 참가하게 되었던 강세황 일행은 북경의 호수 한복판에서 벌어진 빙희를 관람하게 되었고, 그 기이한 경치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호수는 지금 북경 자금성 외편에 위치한 태액지(太液池)입니다. 북해, 중해, 남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원형의 도장 ‘삼세기영(三世耆永: 강세황 집안의 3대가 기로소에 들어감을 기념한 도장)’을, 왼쪽 상단에는 방형의 도장으로 강세황의 호를 새겨 ‘광지(光之)’를 찍었습니다. 북해의 백탑(白塔)을 배경으로 한 중해(中海)에 위치한 정자인 수운사(水雲榭) 근처에서 벌어진 빙희연을 4면에 걸쳐 그린 것입니다. 웅장한 북경 중남해 얼어붙은 호수의 경치를 담고 있습니다.

사진. <영대빙희>, 《영대기관첩》 부분

<영대빙희>, 《영대기관첩》 부분

‘영대빙희’는 조선 사신들이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빼놓지 않고 구경하는 볼거리였습니다. 빙희는 북방에서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던 만주족의 풍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팔기군의 무예 증진을 위한 풍속이었습니다. 홍살문 사이로 지나가면서 무관들이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진기한 무예를 선보였습니다. 삼사는 귀국하여 1785년 2월 14일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12월)21일에는 황제가 영대에서 빙희를 구경하였습니다. 그날 당일 새벽녘에 신 등이 서화문(西華門) 밖에 도착하였는데, 섬라 사신(暹羅使臣)이 신 등의 다음 자리에 섰습니다. 잠시 후에 황제의 난여(鑾輿)가 나와서 국왕이 편안한가를 물었으므로 신 등이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 등이 걸어서 영대 가로 따라가니, 얼마 뒤에 황제가 빙상(氷牀)을 탔는데 모양이 용주(龍舟)와 같았습니다. 좌우에서 배를 끌고 얼음을 따라가는데, 얼음 위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거기에 홍심(紅心)을 달아놓았습니다. 팔기(八旗)의 병정들로 하여금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신발 밑바닥에는 목편(木片)과 철인(鐵刃)을 부착하고,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앉아서 홍심을 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달리면서 꼴로 만든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진. <영대빙희>, 《영대기관첩》 부분 확대

<영대빙희>, 《영대기관첩》 부분 확대

빙희연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현재 북경 자금성 근처 호수입니다. 북해는 현재 북해공원으로 조성되어 북경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중남해는 현재 후진타오 주석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 일반인들 및 관광객들의 접근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전부터 이곳은 황제의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대빙희’는 강세황뿐 아니라 많은 조선 사람들이 연행록을 통해 기이한 장관으로 소개하였던 볼거리 중의 볼거리였습니다.

세로가 불과 23cm 정도 되는 작은 그림이지만, 72세의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갈망하며 떠난 사행길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줍니다. 그림을 이어 삼사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이 빙희에 대한 감상을 읊은 시 3수가 실려 있어 함께 여흥을 나누고 있습니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에서 마지막 채비를 점검할 때에도 그는 부채 위에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그렸고, 돌아오는 길에도 중국 땅 봉황성(鳳凰城)에서 시험 삼아 중국 종이 위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려 조선의 종이 위에 그린 것과 과연 다른가 비교해 보는 등 붓을 놓지 않는 적극적인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렇듯 1784년 사행의 결과물인 강세황의 그림들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다양하고 흥미진진합니다. 한참을 간절하게 염원하며 기다렸던 사행길. 강세황은 부사副使라는 외교적인 중책을 맡고 떠난 사행길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그 생생한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었고, 평생 꿈꿔오던 사행을 드디어 이루어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진. <제시(題詩)>, 《영대기관첩》 부분

<제시(題詩)>, 《영대기관첩》 부분. 삼사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이 빙희에 대한 감상을 읊은 시 3수가 그림에 이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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