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

 부석사의 오래된 큰 그림[浮石寺 掛佛]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부석사에서는 폭 6미터, 길이 9미터가 넘는 비단에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펼쳐 건다면 아파트 4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이 그림은 당연히 법당 내부가 아닌 야외에 걸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법당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불교 의식을 위해 ‘괘불(掛佛)’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누각이나 중정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법당 앞에 걸린 불화를 보며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부석사 괘불, 조선 1684년, 비단에 색, 913.3×599.9cm, K969

부석사 괘불, 조선 1684년, 비단에 색, 913.3×599.9cm, K969

부석사 괘불 도면

부석사 괘불 도면

사과나무가 심어진 산길을 오르면 나지막한 터에 자리잡은 부석사를 만나게 됩니다. 무심한 듯 자리잡은 전각, 화려한 단청 없이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량수전, 안양루 앞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산자락, 자연과 건축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신라시대 창건된 화엄종찰 부석사의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절집의 명성에 비해 괘불이 그려진 1684년의 부석사에 관해 우리가 아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석사에서 있었던 일들과 이 불화에 담긴 내용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이 들려줄 이야기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부석사에서 괘불을 그리기로 결심했을 때 석가모니불의 설법회를 담아야겠다는 것이 첫 번째 의도였을 것입니다. 연꽃에 앉은 석가모니불은 선정에 잠겼던 오른손을 내려 땅을 가리킵니다. 이 손갖춤[手印]은 그가 마군(魔軍)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이룬 존재임을 상징합니다. 연꽃을 들거나 두 손을 합장한 보살, 부처를 따르는 제자, 신통력을 얻은 존재인 나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과 금강역사 등은 공손한 자세로 부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있었던 석가모니불의 설법회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 펼쳐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 위쪽으로 다시 세 부처의 설법회가 있습니다.

 상단의 세 부처

상단의 세 부처
영산회상도는 조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최고의 설법모임이었지만, 영산회상도 위로 세 부처의 설법회를 추가하여 또 다른 부처의 세계를 암시합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부처가 깨달은 우주의 진리, 즉 불법을 뜻합니다. 그 왼쪽은 질병의 고통이 없는 동방 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불의 설법회이고, 비로자나불의 오른쪽은 아미타불의 설법회입니다.

석가모니불의 바로 위편에는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자리합니다. 그 좌우측으로는 질병의 고통이 없는 정토를 다스리는 약사불의 설법회와 즐거움만이 가득한 곳이란 의미인 극락 세계의 아미타불이 있습니다. 동방 유리광정토에 있다는 약사불은 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보여주듯이 약함을 지니고,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광보살, 월광보살, 약사불을 따르는 열두 명의 장군과 함께 합니다. 사람들이 사후 가장 태어나고 싶어 하는 서방 극락 정토의 아미타불 주변에는 현실 세계와 지옥 세계의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담당하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그리고 세지보살, 미륵보살이 있습니다. 보살과 천인, 팔부중과 신들의 무리를 합하면 대략 7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도해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인물이 그려진 복잡한 괘불은 조선시대 제작된 다른 괘불에서는 보기 드뭅니다. 방위에 따라 여러 정토가 있다고 보는 불교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쳐 그리고, 새로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괘불이 낡고 퇴색하자 승려들은 다시 일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는 낡은 괘불을 대신하여 괘불을 새로 그리기로 한 것입니다. 애초에 괘불을 그렸던 화승과 일을 주도했던 승려는 이미 세상을 뜨거나 연로해졌을 것입니다. 괘불을 새로 그리는 것은 큰 과업이었지만 낡은 옛 불화를 보수하는 임무도 맡겨졌습니다. 1684년 부석사 괘불의 화기에는 1745년 이 괘불을 중수하여 청풍 신륵사로 보낸다는 짧은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745년 부석사 괘불

1745년 부석사 괘불

부석사에는 보수가 이루어지던 1745년에 새로 조성한 괘불이 전합니다. 못 쓸 정도로 훼손되지 않았던 옛 괘불은 젊은 화승의 손을 거쳐 손상된 곳을 다시 이었고, 안료가 떨어져 박락된 부분, 희미해진 필선은 붓질을 더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두 세대 전에 괘불을 그렸던 화승들의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작업하였습니다. 새로 괘불을 그린 화승 집단은 과거의 화승들과는 선호하는 안료, 필선을 사용하는 방식, 면을 채우는 문양 패턴, 같은 도상의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지녔지만 자의적으로 고쳐 그리지 않았습니다. 불화 뒷면의 배접지를 새로 하는 것이 큰 관건이었고, 화면 보수는 최소한의 선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신륵사로 보내기 위해 보수한 기록에는 시주와 제작에 관여한 인원과 당시 부석사의 승려 명단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보수의 주된 내용은 배접지를 새로 하는 작업으로 그 비용은 6명의 승려가 마련하였습니다. 괘불 보수를 위해 화승을 청해오는 소임[引勸畵員]도 별도로 기록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의식마다 사용할 새 불화의 제작에 신자들이 적극적이었다면, 오래된 불화의 보수는 부석사 승려가 주도하였습니다.

옛 괘불을 보수한 화승 서기(瑞氣)는 1745년 괘불 조성에 참여한 13명 중 수화승이었습니다. 새 괘불의 제작과 옛 괘불의 보수라는 두 불사는 애초부터 계획되었을 것입니다. 불화가 법식에 맞도록 잘 그려졌는가를 감독하는 승려[證明]와 불사가 가능하도록 일을 도모하고 시주자를 모은 승려[化主]도 동일합니다. 두 불사의 계획자, 총괄자, 감독자, 화승은 동일했으나 괘불을 보수하는 일에는 별도의 시주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새 괘불의 제작을 일임 받은 화승들은 괘불의 도상과 내용에서는 과거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 표현과 양식에 있어서는 그들만의 방식을 구사하였습니다. 도상을 계승한 것은 부석사 승려들의 의지와 주문사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들, 화면에 색을 입히고 문양을 시문한 방식은 새로 괘불을 그린 젊은 화승의 개성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길 떠나는 괘불

예로부터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넘어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문경새재와 죽령, 그리고 추풍령입니다. 부석사 괘불은 아마도 죽령 옛길을 넘어 신륵사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이 길은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가장 오래된 길로,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 장사를 떠나는 사람들, 관리들이 이동하던 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300여 년 전 4월의 어느 날 부석사 괘불은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을 기약하며 청풍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부석사 괘불에는 모든 시공간에 가득하다고 믿어졌던 부처가 상징적으로 도해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연기실상(緣起實相)의 장에서 완전히 동일한 생명을 이루는 전체이자 부분, 부분이자 전체라고 봅니다. 누구에게나 진리를 알 수 있는 밝은 눈과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고의 유연성으로 세상에는 많은 부처가 생겨납니다. 이미 부처가 된 존재는 무수히 많고 현재에도 많은 이들이 부처가 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세상은 부처로 가득할 것입니다. 각 부처는 다른 모습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하나입니다.

괘불은 처음 만들어지던 때부터 계속 사용되어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가 되어도 남아 있었던 괘불은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옮겨져 새로운 인연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빼곡하게 인물이 들어서 있는 깨달은 자, 깨닫지 못한 자의 모임은 고요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인물이 모였으나 고요한 설법회에서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諸法本來不動寂)’는 부처의 가르침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저작권 보호분야 부석사의 오래된 큰 그림 [浮石寺 掛佛]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3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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