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 : 김울림

옛날에는 비 오는 날 비바람과 물웅덩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삿갓과 나막신을 챙기곤 하였습니다.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그림은 어느 비오는 날 소식이 겪었던 일화의 한 장면을 그린 고사도로서 소동파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숭상하였던 옛사람의 아름다운 뜻이 잘 드러난 명품임과 동시에 19세기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역사자료이기도 합니다.

그림 위에 남겨진 수수께끼, 관세음보살의 천억화신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중봉(中峰) 혜호(慧皓) 모사,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106.5×31.4cm, 구2249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중봉(中峰) 혜호(慧皓) 모사,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106.5×31.4cm, 구2249

현재 액자로 되어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그림(이하 입극도(笠屐圖)라 부름)에는 ‘소문충공입극상(蘇文忠公笠屐像)’이라는 화제(畫題)와 함께 서울 봉은사(奉恩寺)의 화승(畵僧)이었던 중봉(中峰) 혜호(慧皓)가 모사했음이 묵서로 남아있어서 작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 위로는 과암(果巖) 홍진유(洪晉裕, 1853~1884이후)가 추사체(秋史體) 행서(行書)로 쓴 다음과 같은 제찬이 있습니다.

“평생에 동파공의 초상화를 접한 것을 헤아려보니 모두 수십 본이다. 광대와 뺨, 수염과 눈썹이 종종 상반되는데 멀리 천 년 전이니 진영을 [하나의 모습으로] 붙잡아둘 수 없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무릇 금(金)같이 정교하고 옥(玉)같이 윤택한 기운에 있어서나 학술과 문장의 뛰어난 자태에 있어서는 서로간의 거리가 멀지는 않다. 이렇게 나는 들었노라. 관세음보살의 천억화신은 각각 청정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구현하고 있으니, 해와 달과 더불어 항상 빛난다고 말이다
(生平計得公像 凡爲數十本. 顴頰與鬚眉 種種卽相反 杳杳千載上 無怪乎眞影不可挽. 至夫金精玉潤之氣 經術文章之姿 大都不相遠. 如是我聞 觀世音以千億化身 各具淸淨寶相 與日月常鮮.)”

관세음보살의 천억화신(千億化神)이라는 말은 억만 갈래의 강물에 비춘 달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화신들 속에서도 관음보살의 존재는 일관되게 투영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말은 세상에 전하는 서로 다른 소동파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소동파의 어떤 참모습이 간직되어 있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문장만 씌어있는 이 그림은 과연 소동파의 어떤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소동파의 생애와 담주 유배시기의 상황

소동파(蘇東坡)라는 호로 더 유명한 소식(蘇軾, 1037~1101)은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에서 태어나 부친 소순(蘇洵, 1009~1066), 동생 소철(蘇轍, 1039~1112)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이름을 올린 북송(北宋) 최고의 시인이자 서화가입니다. 그는 자유분방한 정신과 천재적인 필력(筆力)이 실린 「적벽부(赤壁賦)」와 같은 작품으로 이미 당대(當代)부터 이름을 날려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벼슬은 높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까지 이르기도 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황주(黃州), 혜주(惠州), 담주(儋州) 등 유배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처럼 곡절 많고 기구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나라와 백성에 대한 깨끗한 사랑과 역경을 극복하는 불굴의 투혼을 드러내는 수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김으로써, 천년을 지나 지금까지도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높이 숭상되어 왔습니다.

「입극도」는 소식의 담주 유배시기(1097년 7월~1100년 6월)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남단에 있어 해남성(海南省)으로 불리는 섬에 위치한 담주는 날씨나 교통뿐만 아니라 민족과 언어, 생활관습의 모든 측면에서 변방 중의 변방으로서 당시 소식 말고 누구도 여기까지 유배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62살의 늙은 몸을 이끌고 아열대 우림이 우거진 남녘의 섬으로 떠나게 된 소식은 풍랑으로 배가 묶일 때면 식량마저도 끊겨 햇빛으로 배를 채운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육식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도 약을 써보지 못한 채 넘겨야 하고 안심하고 거주할 집도 없는 상태이며 친구 또한 없습니다. 겨울이면 목탄도 때지 못한 채 자며, 여름에는 시원한 샘물조차 구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쓰지 못하고 지내는 사정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유일하게 위로로 삼는 것이 있다면 이곳엔 말라리아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하의 소동파가 길거리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이야기

장중(張中)과 같이 소동파를 우대하던 관리가 소동파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로 말미암아 해임된 뒤에는 그나마 머물고 있던 관사에서 쫒겨나 성읍 남쪽의 야자수 숲에 허름한 오두막을 지어 거처해야 했습니다. 일흔이 넘은 이웃 노파는 “한림원 나으리, 나으리는 예전에 조정(朝廷)에서 큰 벼슬을 지내지 않았던가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으시겠구려.”라며 은근한 조롱의 뜻을 내비추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 무렵 갑자기 비를 만나게 되어 소식이 이웃 농가에서 삿갓과 도롱이를 빌려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허둥지둥 귀가를 서두르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마을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이 서로 쫒아오며 다투어 깔깔 웃으며, 심지어는 동네 개들마저 한꺼번에 나와 짖어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제 동네 아녀자와 지나가는 개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소동파의 비참한 상황은 말이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당하고도 소동파는 누구를 탓하거나 노여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왜 웃는지도 모르겠고 개들이 왜 짓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의연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입극도」는 바로 그 때의 이야기를 통해 소식의 정신을 형상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당당한 풍채와 그윽한 눈길에서 드러나는 호연지기와 인품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부분)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부분)

삿갓과 나막신을 빌려 신은 채, 폭우를 피해 막 도포를 걷어 부치고 진흙탕을 건너가는 소식을 묘사한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먹선으로 윤곽을 잡은 뒤 쪽빛과 갈색을 부분적으로 엷게 베풀어 완성하였습니다. 삿갓과 나막신, 도포자락과 얼굴 등에 부분적으로 조심스럽게 사용된 담채, 그리고 시원하게 내달렸다가 갑자기 꺾이는 옷 주름의 명료한 필선은 소동파의 고아한 인품과 솔직담백한 품성을 드러내는 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한편, 도포자락을 잡은 오른손과 막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나막신 신은 양 발의 모양이 비오는 중에 진흙탕을 건너가는 장면을 훌륭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담주 유배 때의 이야기가 전하는 황망한 순간의 초라한 기색은 전혀 드러나지 않아 놀라게 됩니다. 긴 수염을 쓰다듬는 왼손의 여유로움과 고개를 순간 왼편으로 돌려 어깨 너머 풍우가 몰려오는 먼 바다를 돌아보는 그윽한 시선에서는 오히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왔던 노대가(老大家)의 오랜 경륜과 호연지기가 묻어나는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소동파의 파란만장한 생애의 가장 비참한 순간을 배경으로 한 이 일화는 그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오히려 찬란하게 빛났던 그의 인품과 호연지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전설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남송대에 시작되고 청대에 꽃핀 입극도의 다채로운 세계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이용림(李用霖) 모사,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72.5×30.5cm, 덕수3887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이용림(李用霖) 모사,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72.5×30.5cm, 덕수3887

「입극도」는 이 그림 말고도 매우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것이 언제부터 그려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소식, 미불(米芾, 1051~1107)과 함께 북송 말 서화계를 주름잡았던 화가 이공린(李公麟, 1049~1106)이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소식이 유배를 간 이후 접촉을 끊었다고 하여 그의 박정함을 비판하는 주장이 이미 남송(南宋) 초에 제기되고 있어서, (邵博撰, 『邵氏聞見後錄』 卷27 「晁以道言」條), 담주 유배 때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식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공린이 알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남송 때에 이미 “삿갓을 쓴 소동파 그림이 요즈음 전하는 것도 있으나, 이것들은 대개 속필이다.東坡戴笠圖 今時亦有畵 此者然多俗筆也.”라는 기록이 보여(費袞撰, 『梁谿漫志』 卷4 「東坡戴笠」條), 누가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하나 늦어도 남송 때부터는 유사한 도상(圖像)의 작품들이 출현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淸) 나라 때에는 고증학자(考證學者)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영향 아래서 많은 수의 소식 이미지가 체계적으로 수집되고 고증되었으며, 모사되고, 유통되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입극도로서는 주지번본(朱之蕃本), 주학년본(朱鶴年本), 왕춘파본(王春波本)을 들 수 있습니다. 옹방강은 명(明) 나라 문인화가 주지번(朱之蕃)이 종이 위에 채색으로 그린 「입극도」(1619년)를 가장 원본에 가까운 입극도로 고증하였는데, 현재 중국 광동성박물관(廣東省博物館)에 소장된 이 작품은 갑작스레 비를 맞은 소동파의 초라한 행색(行色)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옹방강은 조맹견(趙孟堅, 1199~1267)의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벼루 뒤에 새겨진 「입극도」를 주학년(朱鶴年, 1760~1834)을 시켜 모사케 하고 조선(朝鮮)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증정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된 주학년의 「입극도」(1811년)는 빗속에 물웅덩이를 건너다가 동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소식의 비참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품위 있는 자세와 먼 바다를 바라보는 그윽한 시선을 통해 특정시간․장소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초월하여 소식의 인품과 내면의 영원불변하는 어떤 특질을 함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현재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의 입극도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수용 경로도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지팡이를 짚고 먼 바다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주학년본과 관련되는 별개의 부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재(蘇齋), 즉 옹방강의 서재에는 청나라 문인화가였던 춘파(春波) 왕림(王霖)이 모사한 「입극도」도 있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제자였던 허련(許鍊, 1809~1892)이 무수히 옮겨 그려 한국과 일본에 퍼져 나간 「입극도」는 이 왕춘파본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두 점의 입극도 역시 왕춘파본의 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허련이 임모한 왕춘파본 입극도를 중봉당 등이 다시 한번 모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련은 왕춘파본 입극도를 변용한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을 제작하여 김정희가 조선의 소동파임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했습니다.

소동파로 맺어진 동아시아 지식인의 연대와 우의

「입극도」의 제작과 유통은 소동파 숭모 풍조 속에서 소동파의 생일인 12월 19일마다 거행되었던 배파제(拜坡祭), 혹은 동파제(東坡祭)의 확산과 함께 19세기 들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소동파상을 제작하고 이를 걸어두고 숭모했다는 기록은 조선에서 17세기에도 확인되지만 이것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옹방강에게 자극받은 김정희 일파의 주체적 수용노력이 경주되었던 19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일본에서도 나가오 우잔(長尾雨山, 1864~1942)과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 1836~1924) 등이 나타나 소동파를 숭배하는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19세기에 있어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은 올곧은 선비가 추구해야 할 모델을 소동파의 생애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고결한 가치관의 공유에 기반하여 시문과 서신, 서적과 선물을 끊임없이 교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상호 발전을 자극하였습니다. 소동파 「입극도」는 19세기 한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지식인 사이의 긴밀한 연대와 우의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자료라는 점에서도 오늘날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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