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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 용연동유적 철기

평북 위원(渭源) 용연동(龍淵洞)유적에서 출토된 철기는 한반도 최초의 철제품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철기문화의 유입과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용연동유적의 철기는 함께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의 관계를 고려해 연(燕)나라의 철기이거나 연나라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여러 연구자들은 연나라의 철기로 한정하지 않고 연나라의 영향을 받은 요령(遼寧)지역의 독자적인 철기, 고조선(古朝鮮)의 철기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기원전 3~2세기대에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에서 가장 먼저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기원전 1세기대 진(辰)·변한(弁韓)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용연동유적의 철기는 삼한 여러 나라의 초기 철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에서 상대적인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위원 용연동유적 출토품

위원 용연동유적 출토품
일제가 조사한 한반도 최초의 철기

용연동유적은 자강도 위원읍 압록강의 지류인 한백천(漢栢川) 일대에 위치합니다. 1927년 4월 압록강 중류역인 평안북도 위원군 종정면 용연동 일대에서 도로 확장을 위해 도랑을 파다가 명도전 한 무더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9월 명도전이 출토된 지점의 주변이 도굴되면서 10여 점의 철기가 수습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굴조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해 11월 조선총독부에서 공식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1938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史學論叢』에 소개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사람은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顕夫)였습니다. 유물들이 출토된 일대를 1척(약 30cm) 정도 파내려가자 그 아래 냇돌로 쌓인 돌무지[積石] 구조를 발견하였는데, 그 크기가 12척(약 360cm)이었다고 합니다. 고이즈미 아키오는 정식 조사 이전에 확인된 명도전, 철기 등의 여러 유물과 본인이 조사한 돌무지 구조와의 관계는 알 수 없었다고 하면서도 이 유물들을 돌무지무덤[積石塚]의 껴묻거리로 추정하였습니다. 더불어 1947년에 발간된 보고서에서 보고자인 우메하라 세이지(梅原末治)는 한반도 금속 사용의 초기 문물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였습니다.

결국 일본학자들은 철기를 비롯한 일괄 유물이 중국 전국시대의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그 시기를 돌무지무덤에 한정하면서 한반도 철기 문화의 유입 시기를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선사고대 연표에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를 적용한 것과도 연관되며, 우리 문화를 낮춰 보려는 일제의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연나라의 영향을 받은 용연동유적 철기

용연동유적에서는 금속제품만 출토되었습니다. 청동제품은 완전한 형태의 명도전 52점 외에 744점의 명도전 조각과 청동화살촉[銅鏃], 청동허리띠고리[銅帶鉤]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명도전은 용연동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국시대 연나라와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철기는 10점이 출토되었는데 쇠창[鐵鉾] 두 점을 제외하고 모두 농공구입니다. 쇠창은 단조품으로 연나라 도성의 하나인 연하도(燕下都)에서 출토된 쇠창과 유사합니다. 반면 농공구는 모두 주조품으로 기경구(起耕具)와 수확구의 날 부분에 해당합니다.

기경구로는 쇠호미[鐵鋤]와 쇠괭이[鐵鍬]가 있습니다. 쇠호미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가운데 원형의 구멍이 있어 못을 박아서 자루에 직각으로 고정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쇠괭이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날의 반대쪽 구멍에 사각형의 자루를 넣고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용연동유적에서 함께 나온 같은 형태의 쇠도끼[鐵斧] 두 점이 주목됩니다. 이 역시 연나라 고분에서 보이는 특징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확구인 쇠낫 날부분의 반대쪽 가장자리에 돌출된 융기선은 연나라 쇠낫에도 보이는 특징입니다. 이처럼 용연동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철기의 전체적인 특징이 큰 틀에서 연나라의 영향을 받았거나 연나라와 관련이 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연나라의 영향을 받은 용연동 철기는 한반도 일대 여러 지역의 초기철기문화와 관계가 깊습니다. 특히 주조제 농공구에서 보이는 특징은 고조선과 삼한 초기철기문화의 기원을 생각하게 합니다.

용연동유적과 고조선, 삼한의 철기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서는 용연동유적의 철기를 연나라 철기라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용연동유적 철기가 연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유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연나라 철기에서 보이지 않는 특징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반달모양 쇠칼[半月形鐵刀]과 쇠새기개[鐵鉈]는 청동기시대의 도구인 반달모양돌칼[半月形石刀], 청동새기개[靑銅鉈]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받은 유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쇠도끼 역시 전형적인 연나라의 것과 달리 가장자리에 융기된 선이 돌아갑니다. 쇠낫에 구멍을 뚫어 자루에 고정하는 방식은 연나라 쇠낫에서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반달모양 쇠칼, 쇠낫과 같은 수확구에서 보이는 특징은 기원전 3~2세기 고조선의 일부 영역(요하(遼河) 동쪽 천산(千山)산맥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어, 연나라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인 철기문화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쇠도끼에서 보이는 융기선의 특징은 기원전 1세기대 진·변한지역의 쇠도끼로 이어집니다.

용연동유적의 철기는 연나라 철기라는 큰 틀 속에 고조선과 삼한 철기의 특징이 내재되어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연나라의 철기문화가 고조선과 삼한 등 여러 나라로 어떻게 퍼져가는지를 풀어낼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저작권 보호분야 위원 용연동유적 철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3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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