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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전시 바로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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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용현 등록일 2011-08-04 조회 4015

 <145년만의 귀환-외규장각 의궤> 전시 바로보기

 

2. 왕권과 통치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로 운영된 왕조국가였다. 국왕의 공식적인 활동은 곧 통치로 연결되었고,

국왕은 국가의 주요 제사의 최고 집전자로서 왕권의 정통성과 위엄을 드러냈다.

 

 

 왕실과 국가의 상징, 종묘사직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제사였다.

종묘는 유교 사회에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상징하였다. 종묘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를 비롯한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나라의 사당으로, 본묘인 정전과 별묘인 영녕전으로 구성된다.

 

 

종묘친제규제도설, 부분

조선, 고종연간, 견본채색,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종묘는 국왕의 신주가 계속해서 추가되었으므로 몇 차례 증축이 이루어졌고, 종묘에 모신 신주나 책보가 바뀌기도 했다.

양란 이후에는 전란으로 불탄 건물과 신주를 수리하거나 새로 만들었는데, 종묘 건물이나 제도에 변화가 있을 때에는

종묘 관련 의궤를 제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종묘친제규제도설, 부분

조선, 고종연간, 견본채색,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직은 토지신인 사와 곡식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사직 제례는 조선왕조가 왕도정치를 구현하고 민본주의,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면서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종묘제례와 사직 제례는 왕이 직접 참여하는 최고의 국가 제사였다. 왕은 제사를 올리기 일주일 전부터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제사를 준비하였으며, 제사 당일에는 최고의 예복을 입고 왕을 상징하는 의장기와 의장물을 내세우고 조정의

문무백관과 함께 종묘로 행차하여 몸소 제사를 주관하였다.

 

 

 백성을 위한 권농, 친경과 친잠

 

조선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왕실에서도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국왕이 직접 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는 친경 친잠의식을 거행하였다. 친경과 친잠은 국왕과 왕비가 솔선하여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조상에게

공경을 다하는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농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선농단과 누에의 신을 모신 선잠단에 지내는 제사 역시 국가 제사로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친경의궤 1739년 (영조 15년)

1739년 1월 28일, 영조가 친경 의식을 거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친경이란 국왕이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하기 위해 선농단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고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이다.

친경 의식에는 왕과 신하들은 물론 인근 고을에서 선발된 100명의 농민 근교의 75세 이상 노인 40명 등이 함께 참여했다.

 

 

친경 행사장의 배치도인 관경대도에는 국왕을 비롯해 친경에 참가한 인원의 위치와 수, 각각 쟁기를 미는 횟수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친경이 끝난 후에는 축하 교서를 반포하고 참가자들에게 술을 내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국왕 통치의 중심 공간, 궁궐

 

궁궐은 왕을 정점으로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진 통치의 중심 공간이자 국가 최고의 관부였다.

 

종묘수리도감의궤

1637년 (인조 15), 병자호란으로 훼손된 종묘를 보수하고 종묘의 신주를 수리하거나 새로 만든 사실을 기록한 의궤이다.

1636년 (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강화도로 옮겨 묻었다가 훼손된 경위부터 1637년 7월 6일

종묘의 수리와 신주의 개조를 마치기까지의 관련된 문서를 날짜순으로 수록하였다.

이 의궤는 목록 없이 바로 날짜순으로 문서가 시작되어, 체재가 정형화되기 전인 17세기 초 의궤의 양식을 보여준다.

유일본이다.

 

궁궐은 국왕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경영되었다. 왕이 임어하는 공식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이라고 하고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궁궐을 이궁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왕들은 목적에 따라 두 궁궐을 오가며 운영하였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창덕궁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 경희궁은 서궐로 불리기도 했다.

 

 

 

서궐영건도감의궤, 1831 (순조 31)

1830년~1831년 경희궁을 중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서궐은 경희궁의 별칭이다.

경희궁은 1829년 10월 3일 회상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절반 가량이 소실되었다. 영건 공사는 이듬해 3월 8일에

시작되었으나 재정문제로 곧 중단되었다가, 9월 28일 개건이 결정되어 1831년 4월 27일 완료되었다.

목재는 삼남과 황해도, 강원도에서 조달하였고, 800여 명의 장인이 공사에 참가했으며 이들에게는 직책과 일 한 일수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었다.

 

 

 유공자에 대한 치하, 공신녹훈

 

국왕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의 칭호와 함께 여러 특전을 내렸다.

이를 공신 녹훈이라 하는데, 개국이나 반정에 참여하거나 전란 시 전공을 세운 경우, 반란이나 역모를 적발하거나

진압한 경우 등에 내려졌다. 조선시대에는 내려진 공신호는 모두 28종류였다.

국왕은 공신녹훈 후 공신들과 함께 회맹단에 나아가 회맹제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공신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과

자손 대대로 친목할 것을 맹세하였다. 회맹제는 왕과 공신간의 결속과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식이었

다.

 

 

보사녹훈도감의궤

1680년(숙종 6) 허견과 복선군 이남의 역모 사건을 저지한 공신에 대한 녹훈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 사건으로 역모의 주모자가 된 남인이 실각하고 이를 고변한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이를 견신환국이라고도 한다. 5월 18일, 속종은 이 역모를 막은 공신의 훈호를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으로 정하고, 1등 공신 김만기, 김석주 2인 등을 비롯하여 총 6명의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이 중 3등공신이었던 정원로는 8월 10일 이원성이 올린 고변서(告變書)로 인해 오정창, 조빈 등과 더불어 역모의 공모자로 몰려 죽고 공훈도 삭제되었다. 이원성의 상서에는 역모의 정황으로 제시한 조빈의 시조 등의 내용이 한글 세주(細註)로 적혀있어 의궤에 한글이 기록된 희귀한 사례로 주목된다.

 

 

 * 위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 <145년만의 귀환 - 외규장각 의궤> 전시 도록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담당부서문화교류홍보과 이용현 (02-2077-9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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